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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Feb 09. 2020

<버즈 오브 프레이> 리뷰

퇴행성 자기연민


<버즈 오브 프레이(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

(Birds of Prey: And the Fantabulous Emancipation of One Harley Quinn)

★★


 작년의 DC는 과감하게 세계관에서 벗어난 <조커>로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마블의 <어벤져스: 엔드게임>과 같은 해에 배치되며 상대가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았지만, 최소한 그에 비견될 정도의 존재감을 냈던 영화임은 분명하죠. 자연히 그 흥분을 이어받을 다음 주자에게도 관심이 쏠렸고, 할리 퀸이 돌아온 <버즈 오브 프레이>가 본의 아닌(?)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오랜 연인이던 조커와 헤어진 할리 퀸. 그의 암흑가 명성을 방패막 삼아 살아오던 할리는 평생 처음으로 무방비 상태에 놓이고, 고담 시의 가장 비열한 범죄자 로만 사이오니스가 그녀를 쫓기 시작하죠. 그러던 중 한 소매치기가 고담 시의 지배권이나 마찬가지인 금융 정보들이 담긴 사이오니스의 다이아몬드를 훔치는 사건이 발생하고, 모두의 이권과 목숨이 얽힌 커다란 싸움이 펼쳐집니다.


 전작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온갖 이야깃거리에도 마고 로비의 할리 퀸 하나만큼은 만인의 연인으로 남겼고, DC는 바로 여기서 생명줄을 발견했습니다. 그 결과 원작에서는 일말의 접점조차 없었던 할리 퀸과 버즈 오브 프레이가 겸상을 하게 되었죠. 이번 영화의 메인 악당으로 등장하는 블랙 마스크 역시 원작에서는 배트맨과 훨씬 가까운 사이(?)입니다.



 이야기의 출발점은 간단합니다. 고담 시 범죄자들은 누구나 조커라는 괴물을 건드렸다가는 목이 달아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누구보다 아끼는 할리 퀸은 그 덕에 두려울 것이 없었죠. 하지만 그것도 하루아침에 다 끝이 났고, 할리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기회 삼아 자신의 존재감을 세상에 증명하려 합니다. 조커가 없어도 날 건드리면 다 목이 달아난다고 말이죠.


 궁극적인 지향점도 분명합니다. 이 영화는 할리 퀸을 주인공으로 할리 퀸만이 해낼 수 있는 활약을 통해 할리 퀸의 성장을 보여주려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제목은 <할리 퀸 어쩌구>가 아니라 <버즈 오브 프레이>입니다. 할리 퀸을 포함한 하나의 팀이 등장하는 영화이고, 제아무리 할리 퀸이 주인공이라 한들 팀의 존재를 설득할 필요는 분명히 있죠.



 바로 그 점에서 <버즈 오브 프레이>는 실패한 각색입니다. 카산드라 케인, 르네 몬토야, 헌트리스, 블랙 카나리에 이르기까지, 버즈 오브 프레이라는 팀의 결성은 할리 퀸보다는 차라리 블랙 마스크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단 한 명과 얽힌 각자의 과거사를 아주 우연히 한 날 한 시에 처리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의 이야기인 셈이죠.


 여기서 할리 퀸은 어떤 방식으로도 자신이 이 팀과 소동극의 중심이 될 자질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할리 퀸은 그저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유로 노리는 수많은 타겟들 중 한 명에 불과합니다. 지금껏 혼자 각자만의 방식으로 잘 살아 오던 사람들이 갑자기 할리 퀸을 보더니 충성에 가까운 의리를 꺼내드는 과정엔 어떤 정당성도 부여되지 않습니다. 그냥 그렇다면 그런 겁니다.



 마고 로비의 할리 퀸은 <수어사이드 스쿼드> 때의 장점과 단점을 강화해 돌아왔습니다. 외모부터 의상까지의 비주얼은 더욱 화려해졌죠. 총에서도 반짝이 가루가 나가고 폭죽만 터뜨리면 총천연색 축제가 펼쳐집니다. 하지만 야구 배트와 체조 동작으로 점철된 액션은 결투보다는 무용에 가깝습니다. 후속 동작과 맞을 차례를 기다리는 악당들과의 합은 할리 퀸을 포함한 모든 주인공 캐릭터들의 문제이기도 하죠.


 끊임없는 과몰입도 짚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황과 무관한 4차원적 발언과 과장스레 까딱대는 눈썹이 대표적이죠. 아무래도 자레드 레토의 조커를 많이 참조한 듯 한데, 조커는 애초에 연극적인 고조 뒤에 잔혹함을 드러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진중해야 할 때엔 말없이 누구보다 진중한 인물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할리 퀸의 연극적인 대사와 제스처는 어느 쪽으로의 지향점도 없이 공중으로 흩어지는 자기과시에 불과합니다.



 전편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포함, '나쁜 놈 잡는 나쁜 놈' 각본은 대부분 비슷한 구성을 취합니다. 내가 아무리 나쁜 놈이긴 해도 이건 아니라는 결심에서 출발하죠. 관객들이 나쁜 놈 잡는 동기를 이해하기에도, 그래도 주인공이 그렇게까지는 나쁜 놈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설득당하기에도 적당한 설정입니다. 일종의 권선징악이기도 하죠.


 하지만 <버즈 오브 프레이>의 주인공들은 다릅니다.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고, 사실은 누구보다도 여리고 착한 내면을 숨겨 온 영혼들이 그런 세상 앞에 등을 맞댄다고 주장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저질러 온 악행들은 애석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탈이었다고 말합니다. 네가 나였어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라고, 이런 착한 나를 괴롭히는 저놈이야말로 나쁜 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단적인 예로,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삐딱선을 탈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라는 항목엔 카산드라 케인과 블랙 마스크가 둘 다 들어갑니다. 하지만 영화가 이 둘을 대우하고 다루는 방식은 완전한 반대죠. 인과의 순서를 바꾸어 선과 악을 제멋대로 규정한 채 관객들의 판단을 강제합니다. 한 쪽은 재주도 없이 주변인들의 비호를 받으며 살던 대로 잘 살고, 다른 한 쪽은 만악의 근원이 되어 죽음으로 내몰립니다.



 액션엔 힘이 없고 각본엔 줏대가 없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할리 퀸은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와도 팀을 만들어 슈퍼맨도 쳐부술 수 있습니다.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고무 조형물로 악당들을 때려눕히는 광경은 할리 퀸이 아니라 노란 미니언들이 웃으라고 해야 말이 되는 장면입니다. 모든 주조연들이 할리 퀸 일대기의 1차원적인 장식물로 전락한 와중, 이대로라면 모든 후속작들은 할리 퀸 옷입히기 시리즈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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