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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Mar 01. 2020

<젠틀맨> 리뷰

백수 정글의 왕


<젠틀맨>

(The Gentlemen)

★★★☆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 누구냐는 질문에 항상 빼지 않았던 그 이름, 가이 리치가 돌아왔습니다. <맨 프롬 UNCLE>과 <킹 아서>의 부진을 부자 쥐의 <알라딘>으로 씻어내고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독보적인 스타일을 충전해 귀환했죠. 장편 데뷔작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부터 모든 감독작을 감상한 입장에서, 가이 리치가 가이 리치 영화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대단한 뉴스였습니다.



 유럽을 장악한 업계의 절대 강자 믹키 피어슨은 자신이 세운 마리화나 제국을 매물로 올리며 은퇴를 준비합니다. 그렇게 돈이라면 무엇이든 벌이는 미국의 억만장자 매튜 버거와의 빅 딜이 시작되지만, 소문을 듣고 찾아온 무법자 드라이 아이와 돈 냄새를 맡은 사립 탐정 플레처까지 게임에 끼어들게 되면서 오랫동안 지켜 온 정글의 질서가 점점 무너지기 시작하죠. 


 <셜록 홈즈>나 <알라딘>도 흥행했지만, 가이 리치는 남자들의 뒷골목 이야기를 들려줄 때 가장 빛나는 감독입니다. 제작사 이름부터 '터프 가이 필름(Toff Guy Films)'으로 지어 놓고 짜는 판은 그만의 독보적인 스타일을 자랑하죠. 교양 그 자체인 신사들의 영국 영어 대신 얼굴 잔뜩 찡그린 채 내뱉는 사내들의 영국 영어로 전혀 다른 매력을 전달합니다. <킹스맨>의 에그시와 에그시를 괴롭히는 양아치들을 떠올리면 쉽습니다. 


 그런 그의 남자 영화엔 일정한 규칙이 있습니다. 다들 자기가 한 가닥씩은 한다고 자부하는 우두머리들이 부대끼고, 그 아래에서 중간 계급들은 어떻게 한 번 올라가 보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하지만 판의 규칙을 바꾸는 것은 이 모든 것에 초연한, 첫인상만 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던 제 3자들이죠. 와중에 액션과 코미디의 세련된 균형도 빠지지 않습니다.



 <젠틀맨>도 이 공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두머리급인 믹키 피어슨과 매튜 버거,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려는 플레처와 드라이 아이, 이 판에 혼돈을 불어넣는 코치와 복싱 꿈나무들이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죠.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기존의 영화들은 이 정신없지만 매력적인 판 자체에 초점을 두었고, <젠틀맨>은 믹키 피어슨이라는 인물에게 집중합니다.


 정상에 올랐던 사나이가 슬슬 은퇴를 준비하고, 후계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호랑이의 이빨이 빠졌다며 덤벼듭니다. 하지만 호랑이는 여전히 판의 규칙을 한 손에 쥐고 흔들며 건재함과 노련함을 과시하죠. 보통 실제로 은퇴를 앞두거나 한 물 갔다는 소리를 듣는 감독들이 자신을 반쯤 투영하며 선택하는 각본이기도 한데, 자신의 스타일을 억눌렀음에도 성공한 <알라딘> 이후 다시금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매튜 맥커니히는 잠깐의 등장으로도 큰 인상을 남겼던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의 선배 역할에서 한 단계 진화했습니다. 무엇이든 알고 있을 것만 같고, 어떤 상황에 직면해도 당황하지 않고 모든 대비책을 세워 놓았을 것만 같죠. 엄청난 계획력과 실행력을 바탕으로 한 명성과 여유를 부드럽게, 그리고 또 강하게 표현합니다. 오히려 대놓고 지르는 고함보다 짧은 한 마디의 무게가 더욱 강렬한 인물이죠.


 코미디 쪽으로 넘어가자면, 이번에도 가이 리치 특유의 개그감은 곳곳에 산재합니다. 조금 만만해 보이는 사람과 싸움이 붙었더니 덩치 큰 사람을 부르는 장면은 <셜록 홈즈>가, 멋지게 추격전을 하는가 싶더니 금방 숨이 차서 깔딱대는 장면은 <락큰롤라>가, 주먹 좀 쓴다고 자랑하던 동네 양아치가 판의 변수가 되는 설정은 <스내치>가 떠오르죠. 감독의 전작들을 열심히 봐 왔다면 알아볼 만한 장점들이 모여 있습니다.


 

 반대로 이 스타일에 심취해 대중성을 순간적으로 잊는 순간도 더러 있습니다. 특히 관객들을 확 집중시켜야 하는 초반부의 과욕은 장기적인 진입 장벽이 됩니다. 처음 보는 그 많은 인물들을 또 다른 처음 보는 인물들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는데, 누가 누구고 어떤 인물인가를 파악하기에도 바쁜 시점에 화면 연출과 대사에 장난까지 치니 정신이 없습니다. 


 지나치게 완벽한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는 한계도 분명합니다. 완전체 수준으로 머리가 좋거나 강력한 인물은 대부분의 창작물에서 최후의 조력자 정도로 등장하는데, 이유는 단순합니다. 알아서 다 해먹으면 긴장감이 떨어지는 탓이죠.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다는 속성은 한두 번 정도면 효력을 다합니다. 물론 <젠틀맨> 역시 그걸 알고 레이몬드라는 오른팔급 인물을 내세워 아껴 쓰긴 하지만, 결국 주인공은 믹키죠.



 고상함과의 궁합을 시험해 보았던 <맨 프롬 UNCLE>도 좋았지만, 가이 리치 영화는 역시 뒷골목과 만났을 때 최대한의 시너지를 냅니다. 도무지 무관해 보였던 각계각층의 캐릭터들이 하나의 사건을 향해 말려들어가는 과정도 흥미진진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의 뚜렷한 개성도 매력적이죠. 감상을 떠나서 체육관 친구들이 입었던 트레이닝복 검색해 볼 사람은 확실히 많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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