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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Apr 28. 2020

<사냥의 시간> 리뷰

생략 중독


<사냥의 시간>

★★


 2011년 <파수꾼>으로 이제훈과 박정민을 발굴해낸 윤성현 감독이 9년만에 돌아왔습니다. 전작의 명성은 재발견에 재발견을 거듭하며 줄어들 줄을 몰랐고, 그 멤버가 그대로 다시 뭉친 차기작은 당연히 커다란 주목의 대상이 되었죠. 개봉 연기에 소송까지 거치며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렵게 관객들을 찾아왔지만, 덕분에 넷플릭스 영화로는 이례적인 관심을 끌었습니다.



 희망 없는 도시, 감옥에서 출소한 준석은 가족처럼 지내던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위한 마지막 한 탕을 준비합니다. 제발 좀 사람답게 살아 보자고 시작한 일은 의외로 순탄하게 흘러가고, 새로운 출발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푼 기대도 잠시, 언제 어디서나 꼬리를 놓치지 않는 정체불명의 추격자가 나타나며 상황은 악몽으로 치닫습니다. 


 줄거리는 제목 그대로입니다.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 건드린 우리의 주인공들이 초인을 방불케 하는 사냥꾼에게 쫓깁니다. 모든 것을 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누군가가 자신들을 쫓아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치기가 그들의 숨통을 점점 죄어 오는 구성이죠. 추격자의 상상을 뛰어넘는 활동 반경과 행동력을 주인공들의, 그리고 관객들의 공포와 맞물리도록 만들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시대 배경입니다. <사냥의 시간>은 흔히 디스토피아라고 부르는 세기말 감성에 근미래 SF를 살짝 끼얹었습니다. 낡을대로 낡은 길거리와 원화 대신 통용되는 달러화, 그럼에도 지금의 기술력을 훨씬 넘어서는 듯한 휴대폰과 표지판의 디스플레이 등에서 짐작할 수 있죠. 거창한 세계관 설명을 생략하고 관객들의 능동적인 이해를 기다립니다.


 바로 이것이, 생략부터 하고 이해를 바라는 이 태도가 <사냥의 시간>의 가장 큰 패착입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꼭 설명해야만 하는 것들이 무분별하게 뒤섞여 있습니다. 일부러 그랬다면 판단 착오고, 모르고 그랬다면 잘못입니다. 기승전결 중 하나에 구멍을 낸 뒤 그 구멍을 관객들의 상상에 맡기려면 나머지를 아주 완벽하게 보여준 뒤여야 하는데, <사냥의 시간>은 온갖 곳에 구멍이 마구잡이로 나 있죠.



 예를 들어 극중 한(박해수)의 과거는 굳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어디서나 혼자 다니며 어둠 속에 있기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캐릭터의 무게감을 대신할 수 있죠. 한이 머무르는 집 거실 벽엔 사람의 귀 여러 개가 액자에 진열되어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이 인물이 얼마나 잔혹하고 또 그것을 스스로 얼마나 즐기는 인물인지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반면 장호(안재홍)의 천식이나 옷을 훔쳐 입는 버릇, 자는 척하는 버릇은 이야기가 조금 다릅니다. 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부터 일종의 복선처럼 보여주는 특징들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으려고 계획을 하고 있지만, 갑자기 튀어나오면 뜬금없으니 정당성을 쌓아가는 것이죠. 사용하면 복선이고, 사용하지 않으면 맥거핀입니다. 관객들의 집중력과 추리력을 시험하려는 장치라고도 볼 수 있구요.



 이 두 가지 유형은 비교적 긍정적이지만, 나머지 하나는 부정적인 동시에 극의 완성도를 크게 저해합니다. 설명을 꼭 해야 하는데 설명하지 않는 것들이죠. 한이 주인공들의 뒤를 이토록 정확하게 쫓을 수 있는 이유, 밀입국 배를 일찍 불러 놓지 않는 이유, 꼭꼭 숨어 있어야 하는 곳에서 자꾸 밖으로 나오는 이유 등 목록은 셀 수 없이 이어집니다. 캐릭터의 개성과 각본의 설득력을 무너뜨려 결국엔 '말이 안 되는 영화'라는 최악의 결과를 향하죠.


 이쯤 되면 관객들은 영화의 모든 구성 요소를 능동적으로, 그리고 회의적으로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만든 건 설명을 귀찮아한 영화 스스로의 잘못이죠. 피할 땐 다 피하고 맞을 땐 다 맞는 총알도 불만이 되고, 굳이 CG 비용을 들여 가며 꾸며낸 근미래 설정들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누구는 왜 더 이상 안 나오고 이건 왜 이렇게 되는가 하는 의문에 영화가 공들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고 쫓기는 캐릭터들을 다룰 때엔 선악의 구분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누군가가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온다면 선과 악이 자연스럽게 나뉘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음에도 생명이 달렸다는 이유 하나로 주인공들에게 선의 속성을 너무나 쉽게 내주는 영화들이 많습니다. 기구한 사연을 끼우더라도 주인공 타이틀이 자동으로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되겠죠.


 <사냥의 시간>의 주인공들은 추격자를 비난하며 본인들의 인간적인 면을 내세웁니다. 돈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그렇게 쫓아오냐면서, 서로를 보듬고 가족을 챙깁니다. 하지만 그들은 순전히 본인들 잘 먹고 잘 살자고 무장 강도로 나선 전과자들입니다. 싸워 이겨야 할 것은 있어도 억울해할 것은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영화는 주인공들의 강도짓이 끝남과 동시에 한의 추격을 일종의 누명으로 여기는 것만 같습니다.



 말꼬리마다 붙는 욕설과 이리저리 뒤섞이는 청년들의 내면, 인기척 대신 붉은 조명으로 가득 채운 후반부 길거리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파수꾼 2049> 쯤을 지향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인물과 상황으로 빚은 긴장은 시작에 불과한 극초반부 강도 장면에서 수명을 다하고, 긍정적인 놀라움은 전무한 이후의 시간은 전혀 엉뚱한 것을 사냥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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