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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Jun 11. 2020

<결백> 리뷰

기억의 재판


<결백>

★★★


 극장에 대형 포스터가 걸린 게 2월 말이었던 듯 한데, 개봉을 두 번이나 연기하면서 이제서야 만나게 된 <결백>입니다. 박상현 감독의 데뷔작이자 신혜선의 첫 스크린 주연작이죠. 함께 출연한 주조연으로는 배종옥, 허준호, 홍경, 태항호, 고창석, 박철민, 정인겸 등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8일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열린 시사회 덕에 무대인사까지 구경하고 왔네요.



 유명 로펌의 에이스 변호사 정인은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농약 막걸리 살인사건이 일어났음을 알게 됩니다. 치매에 걸린 엄마 화자가 용의자로 지목되고, 그녀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 직접 변호를 맡게 되죠. 사건을 추적하던 중 시장 추인회를 중심으로 한 조직적이고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한 정인은 엄마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과 맞서기 시작합니다.


 아마 평소 극장 관람 횟수가 평균 이상인 관객이라면 장장 3-4개월 동안 <결백>의 예고편만 수십 번을 봤을 겁니다. 아픈 사람 데려다 놓고 뭐 하고 있냐는 호통에 살인 용의자 찾고 있다며 두둥 끝나는 바로 그 예고편이죠. 다른 건 몰라도 오프라인 광고 노출 빈도는 남부럽지 않은 수준이었을 텐데, 드디어 그렇게 쌓아올린 기대감과 궁금증을 해결할 시간입니다.



 시작은 일단 흥미롭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에서 출발하며 미스터리 티를 폴폴 내고, 여기에 범인과 의도 둘 다 알 수 없는 사건을 끼얹으며 호기심을 더합니다. 누가 왜 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데, 딱 봐도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엮여 벌어진 일의 냄새가 납니다. 풀어내야 하는 것도 많고 그걸 막으려는 사람은 더 많으니, 제아무리 대형 로펌의 에이스라고 해도 쉽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단서가 나타나고 발견되는 과정에서 즐겨 사용되는 소재나 설정들이 즐비합니다. 대표적으로 자폐아가 있죠. 어느 장소에서 어떤 행동을 하고 있어도 개연성을 크게 해치지 않기에, 누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장소에서 상상도 하지 못한 방법으로 사건의 결정적인 열쇠를 쥐게 되는 전개가 많습니다. 이를 틀어막으려는 세력을 묘사하며 관객들의 감정을 자극하기도 용이하구요.



 치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증언이나 증거의 토대가 되는 기억을 건드려 사건을 크게 뒤집기도 쉽고, 넋이 나간 모습으로 일관하다가 또렷한 눈빛을 내뿜으며 눈물샘을 자극하는 데에도 이만한 게 없습니다. 이런 장치들은 보통 주요 인물이나 물건을 우연히 마주치는 상황을 대신하는데, <결백>은 이처럼 인물 관계도부터 주인공의 사건 해결과 연출 의도에 맞추어 구성했죠.


 무대는 움직이기 쉽게 만들어 두었으니 앞으로 잘 가기만 하면 됩니다. 실제로 <결백>의 사건 해결 과정은 대단한 추리를 동반한다기보단 어딘가에 적절히 놓여 있는 단서를 발견하면 퍼즐이 하나씩 알아서 맞춰지는 구성이죠. 형사나 탐정이 아닌 변호사가 주인공이고, 범인 추적과 재판이 동시에 진행되기에 택한 방향이라고 봐야 합니다.



 추적을 하는 쪽이 있으면 방해하는 쪽의 균형도 맞춰 줘야 합니다. 대부분은 별 일 아닌 줄 알고 파기 시작했다가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나오는 또 다른 사건과 이름들을 마주하며 커다란 벽을 느끼는 전개가 많죠. <결백> 역시 시골 경찰 몇 명 정도 엮인 줄 알았던 덩치가 변호사부터 병원장, 부장검사까지 휘두르며 정인을 끊임없이 위기에 빠뜨립니다.


 제한된 면적을 쭉쭉 잡아당겨 늘리면 구멍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결백>도 마찬가지죠. 일은 복잡해지고 엮인 이름들도 높아지는데, 주인공 정인은 사건을 능수능란하게 해결하는 변호사보다는 평생 잊고 살았던 엄마라는 존재를 재발견하는 딸에 가까워집니다. 오히려 위험을 무릅쓰는 쪽은 필요 이상으로 열심이라 의도가 의심스럽기까지 한 든든한 조력자들이죠.



 이러다 보니 병원과 재판정에도 마수를 뻗치는 분들이 누구보다 자유롭게 활개치는 시골 순경이나 동네 백수 하나 틀어막지 못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무언가 심각하게 틀어져야 할 상황이 뺨 몇 대 맞고 끝을 봅니다. 이건 함정이 틀림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일이 쉽게 풀리는 순간이 잦은데, 반전이 없는 것이 반전인 상황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렇게 생긴 이성의 빈 자리엔 빠지면 섭한 감성의 가족애를 채워넣었습니다. 현재 시점과 과거 시점을 오가며 한평생 오로지 자식만을 위해 살아왔음을 매 순간 드러내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가슴 속에 차갑게 묻고 집을 떠났던 딸이 서로를 잃어버렸던 조각처럼 맞춰집니다. 의도가 분명하고 결과는 더욱 분명한 장면과 대사가 신혜선과 배종옥의 내공으로 완성됩니다.



 주어진 재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은 아쉽지 않게 해내는 영화입니다. 죄와 벌이라는 소재를 시기나 유행에 구애받지 않는 안전한 방법으로 풀어냈고,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를 만나 계획한 메시지와 울림을 향해 전진합니다. 극장가에 굵직한 한국영화 가뭄이 시작된지도 몇 달이 지났는데, 최소한 거기에 단비가 되어 줄 영화인 것만큼은 분명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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