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킴지 Aug 30. 2020

<테넷> 리뷰

신도 전용 미로


<테넷>

(Tenet)

★★★☆


 전 세계가 발자국 하나하나를 주목하는 바로 그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테넷>을 관람했습니다. 제작 정보의 파편만 보면서도 모두가 열광했지만, 막상 예고편이 나오고 나서도 도무지 무슨 영화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작품이죠. 북미 지역 극장들의 영업 재개와 맞물려 살짝 과장하자면 2020년의 첫 번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라고 부를 수도 있는 영화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뒤집는 '인버전'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세상을 파괴하려는 무기 밀매업자 사토르. 지금까지 맞섰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 사토르의 야심과 계획에 하나둘씩 무너지는 현실을 지키려 전직 CIA 요원과 자칭 뭄바이 최고의 요원은 말 그대로 시공간을 넘나드는 작전을 시작합니다.


 일단 어렵습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고유명사에 전문용어들이 남발합니다. 엔트로피가 어쩌고 핵분열 역복사가 저쩌고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귀를 붙잡습니다. 하지만 멈춰선 안 됩니다. 뻔히 보이는 함정 단어에 걸려 넘어져서는 안 됩니다. 애초에 한 번만 봐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든 영화입니다. 그것이 <테넷>의 장점이자 단점이고, 정체성이자 진입 장벽입니다.



 판을 까는 기본적인 접근법은 전작들과 엇비슷합니다. 본격적으로 말하고 싶은 핵심 개념은 일찍이 상정되어 있지만, 곧바로 꺼내들면 알아들을 사람이 한 명도 없기에 개념 설명과 연습 문제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다가 응용 문제가 나오고 심화 문제가 나온 뒤 이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정식 고사가 치러집니다. 고사를 치르는 시점에서는 연습 문제는 눈 감고, 심화 문제는 실수 없이 풀어내야 하죠.


 <인셉션>이나 <인터스텔라>도 그랬습니다. 무의식부터 우주까지 영 집어넣기 어려운 개념들이 즐비하지만, 여러 캐릭터들의 반복적이고 친절한 설명 덕에 끝내 이해하는 것이 아주 어렵지는 않습니다. 꿈의 시작 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특정 행성에 떨어지면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등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반 상식들과 연계해 흥미도를 끌어올리기도 하죠.



 그런데 <테넷>은 조금 다릅니다. 보통 시간 여행이라고 하면 특정한 시간대로의 이동을 떠올리죠. 그러나 <테넷>의 인버전은 시간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역행하는 개념입니다. 출발점부터 쉽지는 않은데, 이는 수능 수학을 앞둔 사칙연산에 지나지 않습니다. 멍하니 보다 보면 뭔가 대단하고 화려한 광경이 펼쳐지기는 하나 뇌에 도달하는 것은 전무한 난관에 봉착하기 쉽죠.


 극중 이런저런 사건이나 인물들의 시간대를 하나하나 재배열하는 과정, 등장하는 여러 이름들이 사토르 마방진이라는 라틴어 글귀에서 따 온 것이라는 사실 등에 흥분할 사람들은 능동적인 팬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들은 기본적인 흥미의 플러스 알파가 되어야 하겠지만, 줄거리 이해는 물론 심하면 관람 자체를 포기하게 할 가능성도 꽤 높습니다.


 모든 복잡한 단어들을 제외하더라도 상황이 불친절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초장부터 누가 어디의 무엇인지조차 설명하지 않은 채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 던져넣고 출발하는데, 알고 보니 이 상황은 더욱 예전부터 더 큰 규모로 진행 중이었던 또 다른 상황의 막바지였음이 드러나는 구조가 반복되죠. 딱 한 번 보고 이 영화를 전부 이해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거나 착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놀란은 이제 스스로를 그런 눈치에서 자유로운 감독으로 규정했습니다.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듣고 즐길 사람만 즐기라고 선언합니다. 기승전결의 순서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마당에 2회차 이상이 아니면 포착하는 것이 불가능한 떡밥과 장면들을 사방에 늘어놓았죠. 심지어 몇몇 캐릭터의 입을 빌려 이해하지 말고 즐기라며, 못 알아들었으면 그냥 잠이나 자라고 장난스레 이야기합니다.


 효과는 확실합니다. 시간에 순행하는 무언가와 역행하는 무언가가 충돌하는 광경은 그 자체만으로 대단한 볼거리를 만들어냅니다. 단순한 1대 1 주먹다짐부터 소대와 소대가 전장에서 맞붙는 전투까지, 보고만 있어도 입이 절로 벌어지는 화면이 쉽게 만들어지죠. 머리는 아프지만 눈은 즐거우니 일단 시선이 붙잡히고, 이해는 그 다음 일로 남겨두게 됩니다.



 액션도 진일보했습니다. 그토록 극찬받던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도 배트맨과 베인의 헛손질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지만, 그 때의 비판들을 작정하고 부수려는 의지로 가득하죠. 격투, 자동차 추격, 폭발 등 기본적인 액션의 재료에 시간 역행이라는 비장의 양념까지 첨가하니 파괴력은 배가 됩니다. 최소한 눈으로 보이는 곳에서는 약점 잡힐 일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인버전을 필두로 한 설정 덩어리들과 그로 인해 이래저래 뒤섞이고 얽히는 기승전결도 중요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인물들과 그들의 이야기입니다. <테넷>에선 끝까지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주인공(The Protagonist)과 닐, 캣, 그리고 사토르 정도를 주요 캐릭터로 꼽아 볼 수 있겠죠. 사랑과 우정을 비롯한 선의는 물론 복수와 파멸을 비롯한 악의로도 아주 단단히 묶이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어떤 놀란 영화보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그 어떤 영화보다 골치아픈 자체 설정을 잔뜩 들고 나온 탓에 인물들의 상호작용은 자연스레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각자의 목숨이 달린 상황과 상황이 연결되는 감정선은 다소 빈약하고, 이를 보완하려 인물들의 능력치를 만능에 가깝게 끌어올려 현실성을 더욱 떨어뜨립니다.


 설정들 역시 진입 장벽이 워낙 높아서 티가 잘 나지 않지만, 의외로 상당히 많은 잠재력이나 디테일을 쉽게 넘어가기도 합니다. 순행하는 시간에서 역행하는 사물을 활용하는 전개는 극초반부 설명을 제외하면 전혀 등장하지 않고, 등장인물들을 제외한 일반 사람들이나 세상은 각본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식이죠. 전 세계를 무대로 함에도 설정에 비하면 판이 좁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때문에 결말부의 대사들과 맞물려 아마도 가장 큰 메아리를 기대했을 주인공 캐릭터의 매력은 현저히 떨어집니다. 작중에서 주인공의 가장 원초적인 동력은 호감일 텐데, 놀란식 운명론이나 좌우명을 이야기하는 다른 인물이나 대사들과 충돌하며 스포트라이트가 분산되죠. 게다가 사랑의 가치는 이미 <인터스텔라>에서 차원을 뛰어넘는 위대한 힘으로 강력하게 전달된 바 있구요.


 오히려 영화가 끝난 뒤 가장 진한 여운을 남기는 캐릭터는 로버트 패틴슨의 닐입니다. 제임스 맥어보이와 제시카 차스테인의 <엘리노어 릭비> 시리즈처럼 같은 시간대의 다른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가 나온다면, <테넷>의 닐 버전은 그야말로 심금을 울리는 SF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죠. <트와일라잇> 이후 착실하고 굳건하게 쌓아 온 연기력을 상업 영화에서 다시 훌륭하게 발휘해냈습니다.



 수많은 강점이 있음을 스스로가 아주 잘 알고, 그를 자신 있게 드러내는 데 망설임이 없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나친 자신감에 선택과 집중 자체를 신경쓰지 않은 영화이기도 하죠. 되는 대로 마구 늘어놓을 테니 마음에 드는 게 있는 사람들만 마음에 드는 걸 고르라고 당당히 외칩니다. 놀란이라면 그래도 되는 감독이라고는 모두가 생각하겠지만, 막상 그를 받아들이는 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