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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Sep 18. 2020

<뮬란> 리뷰

꽃을 이겨내고 피어난 역경


<뮬란>

(Mulan)


 돈 생각 좀 난다 싶으면 넘쳐나는 저작권 곳간 한 번씩 빼먹고 있는 디즈니의 다음 타자, <뮬란>입니다. 1998년 제작되었던 동명의 애니메이션을 실사판으로 옮긴 작품이고, 뮬란 역의 유역비를 포함해 견자단, 이연걸, 공리 등 한국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얼굴들이 참여했죠. 무려 2억 달러를 들여 제작했으나 북미를 포함한 많은 국가들에서는 스트리밍 서비스로 공개되는 등 고초를 겪는 중입니다.



 무예에 남다른 재능을 지닌 뮬란은 좋은 집안과 인연을 맺어 가문을 빛내길 바라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본연의 모습을 억누르고 성장합니다. 어느 날 북쪽 오랑캐들의 침입에 징집령이 떨어지고, 뮬란은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들 몰래 전장으로 향하죠. 잔인무도한 적장과 요술로 무장한 마녀까지, 위험에 빠진 동료와 가족들을 구하고 진정한 전사로 거듭날 뮬란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뮬란>이 실사화된다는 최초의 선언을 제외하면 어째 좋은 소리가 없었던 프로젝트입니다. 리 샹이나 샨유는 물론 무슈나 크리켓 등 원작 애니메이션의 주조연들이 대거 삭제되었고, 'Reflection'을 비롯한 OST도 모두 빠지며 뮤지컬 색채도 완전히 제거되었죠. 실사화 과정에서의 현실성을 위해서였다기엔 불사조나 마녀 등 새로 더한 것들의 설득력을 떠올릴 수밖에 없구요.



 영화 밖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습니다. <뮬란>부터 도입된, 영화관 티켓 가격보다 훨씬 비싼 디즈니 플러스의 프리미엄 가격 정책은 애교에 불과했죠. 주연배우 유역비의 정치적 입장이나 디즈니의 눈 가리고 아웅식 정의가 화두에 올랐고, 중국 정부와의 입장 정리를 공식화하라는 미국 의회의 서한이 공개되는 등 영화를 단순히 영화로 볼 수 없다는 선언도 큰 지지를 얻는 지경이 되었죠.


 그래도 최소한 영화만 잘 나오면, 그로 인한 팬 혹은 지지 세력이 생긴다면 힘을 얻을 여지는 있었습니다. 디즈니와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단순한 영화사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과거와 추억을 책임지고 있죠. 뭐가 어떻건 난 여전히 디즈니를 사랑한다고 외칠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2020년판 <뮬란>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가능한 모든 수식어를 망가뜨렸습니다.



 뮬란의 어린 시절에서 출발하는 초반부부터 느낌이 요상합니다. 정확히는 합이 아주 정직하게 맞춰진 와이어 액션의 첫인상인데, 디즈니나 할리우드는커녕 평범한 중국 무협물의 기준도 간신히 통과할 정도의 완성도죠. 지금 들려주고 보여주는 이야기가 어떻게든 중국의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 더 잘 할 수 있는 것조차 만인에게 익숙한 수준으로 조정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액션 영역에서의 이 일관성은 영화 내내 지속됩니다. 와이어만 간신히 지운 듯 부자연스러운 움직임과 힘이라고는 실리지도 않은 합 맞춘 주먹다짐 등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죠. 펄쩍 뛰어 뾰족한 걸 걷어차 호크아이마냥 명중시키는 뮬란식 마무리도 질리도록 낭비하고, 제대로 된 전쟁씬 하나 없이 일개 소대쯤 되는 병력이 휘적대는 광경이 한계입니다.



 캐릭터 쪽은 더욱 심각합니다. 맹목적인 지배욕으로 가득한 보리 칸은 원작의 샨유와는 댈 수도 없는 인물이고, 크리켓을 포함한 뮬란의 개그용 동료들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사실상 연인 위치로 나온 홍후이 역시 뮬란의 홀로서기를 눈 앞에 대고 흔들어댈 생각에 신난 각본에 밀려 없으니만 못한 존재감으로 러닝타임을 낭비하구요.


 그나마 서사를 넣으려고 노력한 마녀 시아니앙 쪽은 도무지 앞뒤도 맞지 않는 설정에 자멸하는 인물입니다. 동물로 변신하고 전투력도 만땅인데다 누군가의 몸에 들어갈 수도 있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의 소유자죠. 그런 사람이 단순히 세상이 자신을 등진다는 이유로 방황하며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다가 뮬란을 자신과 동일시한다니, 누가 누굴 따르고 불쌍히 여기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갖고 있는 문제의 처음이자 끝은 다름아닌 뮬란입니다. 뮬란은 태생부터 '완벽'이라는 단어를 의인화한 인물입니다. 외모나 성격은 물론 상황 판단력과 전투력에 이르기까지 부족함이라고는 없습니다. 벌어지는 갈등은 모두 이토록 완벽한 뮬란의 잠재력을 시기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과 세상 탓이고, 뮬란은 그조차도 타고난 인내와 겸양으로 감쌉니다.


 다시 말해 뮬란에겐 성장의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머리도 잘 쓰고 활도 잘 쏘고 봉도 잘 다루고 발차기도 끝내줍니다. 모든 것은 이렇게 완벽한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상의 문제입니다. 실수도 없고 판단 착오도 없습니다. 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마침 그런 사람이 큰 소리로 떠든다고 군 통솔권을 덥썩 내주는 전개는 우습지도 않습니다.



 '역경을 이겨낸 꽃'이었던 뮬란의 정체성이 뿌리뽑혔습니다. 누구도 이런 캐릭터에겐 공감할 수 없습니다. 그저 어마무시한 기를 타고난 덕에 자신을 등지던 세상을 자기 앞에 무릎꿇게 만드는 건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한 가지 음과 한 가지 표정으로 일관하는 유역비의 연기는 이처럼 단조롭기 그지없는 뮬란의 개성을 만나 아마도 디즈니 역사상 손에 꼽을 무매력 몰개성 캐릭터를 완성합니다.


 이런 캐릭터가 중심이 되어 빚어나가는 기승전결이 멀쩡할 리 없습니다. 굳이 다른 병풍 주조연들을 지어내서 전쟁물로 덩치를 키울 바에야 그냥 마을 단위로 획기적인 농사법이나 발명하는 전개로 만들었어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죠. 뮬란이 엮이는 순간마다 영화 속 캐릭터들은 물론 영화 자체의 설득력과 완성도마저 뮬란의 완벽함을 위해 끊임없이 희생당합니다.



 인물, 사건, 인물이 만들어내는 사건, 사건이 만들어내는 인물, 심지어는 2억 달러를 퍼부은 CG까지 어디 하나 멀쩡한 구석이 없습니다. 자아 성찰부터 대규모 전쟁씬을 아우르는 영화에 명대사도 명장면도 하나 없다는 것은 엄청난 문제입니다. 이런 것을 해내겠다는 자신감 대신 이런 것은 하지 않겠다는 눈치만 남으면 이와 같은 불명예스러운 결과물이 탄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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