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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Oct 20. 2020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리뷰

드래곤 헤드 스네이크 테일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


 2019년 <말모이>로 관객수 280만 명을 넘겼던 배급사 롯데 엔터테인먼트와 제작사 더 램프 조합이 재회했습니다. <도리화가> 이후 5년만에 돌아온 이종필 감독과 고아성, 이솜, 박혜수, 김원해, 김종수, 데이빗 맥기니스, 박근형, 타일러 라쉬(!)가 모인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죠. TOEIC의 E가 영어임에도 굳이 '영어토익반'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도 살짝 궁금해지는 제목입니다.



 퍼펙트한 실무 능력에도 잔심부름이나 하는 생산관리 3부 이자영, 추리소설 마니아로 돌직구 멘트의 달인인 마케팅부 정유나, 수학 천재임에도 가짜 영수증 메꾸기 바쁜 회계부 심보람. 삼진그룹 입사 8년차인 이들은 대리가 되어 일다운 일을 하길 꿈꾸지만, 어느 날 자영이 우연히 목격한 회사의 폐수 누출 사건을 계기로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긴 고군분투를 시작합니다.


 줄기가 두 개입니다. 회사와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에 맞서 대리 승진이라는 업적을 달성하려는 도전이 하나, 윗선이 묻으려는 비리를 파헤쳐 정의를 구현하려는 분투가 다른 하나입니다. 얼핏 보면 딱히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바위를 부수려는 계란들의 몸부림이라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죠.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이 가느다란 연결선을 서로의 동아줄로 삼으며 전진합니다.



 그러나 좀처럼 엉겨붙지 않습니다. 두 사건의 동력이 서로를 밀어내는 탓입니다. 회사에서 승진을 하고 싶은 사람이 회사의 비리를 파헤쳐 까발린다니, 아주 똑똑한 다른 수가 있지 않은 이상 말이 될 수 없는 문장입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다더니, 승진은 하고 싶지만 회사는 부수고 싶은 21세기식 패션 정의가 영화의 전반을 지배합니다.


 이 역설이 만들어낸 실금은 주인공들이 발을 담근 사건의 규모가 고구마 뿌리마냥 감당할 수 없어질수록 덩치를 키웁니다. 이토록 못돼먹고 잘못되고 사악한 기업의 구린내를 맡으면서도 바로 그 곳의 뭣도 아닌 대리가 되어 일다운 일을 하는 것이 영화와 주인공들의 지향점입니다. 2절 3절 4절까지 가는 사건의 전말보다도, 각본이 숨겨둔 비장의 수가 없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반전입니다.



 정말로 차별과 편견에 가려졌던 본인의 실력을 토익이라는 객관적인 지표를 약소하게나마 빌려 증명해내는 전개였다면 달랐을지 모릅니다. 모두가 찬양하던 파트너 내지는 경쟁 기업의 어두운 내막을 외로이 파헤쳐 성과를 만들어내는 전개였다면 또 달랐을지 모릅니다. 둘 다 외따로는 무언가에 가려졌던 주인공들의 능력을 세상에 자랑할 기회가 맞지만, 공존은 처음부터 불가능했습니다.


 섞이지 않는 둘을 담아내려니 결국은 모두 놓치고 맙니다. 의외로 짜임새 있게 시작된 폐수 유출 사건은 주인공 맞춤형 힌트를 남발하다가 이내 스스로의 뼈대마저 무너뜨립니다. 기본적으로는 사소한 무언가가 도미노를 만들어 한 나라에서 제일가는 기업의 명운을 좌우하는 전개지만, 쓰러지는 도미노가 멈추려는 순간마다 시도때도없이 손가락을 갖다대니 금새 우스워지죠.


 

 주인공들을 제외한 모든 캐릭터들은 점차 적당한 때에 적당한 능력을 발휘하는 적당한 도구로 변모합니다. 분명 도입부에는 이 망할 회사의 망할 꼰대이자 망할 남정네들이었던 사람들에게도 너무나 쉽고 상업적인 면죄부를 남발하죠. 심지어는 능력도 없는데 잘 먹고 잘 산다는 식으로 묘사했던 사람들의 활약이라 초반부의 그 많던 불만은 한순간에 사회 초년생의 착각으로 격하됩니다.


 사건을 해결해서 토익 성적이 오른 것도 아니고 영어 공부를 해서 비리가 드러난 것도 아닙니다. 볼수록 아닌데 지날수록 맞다고 합니다. 제목은커녕 각본 전체에서 토익반 이야기를 다 빼도 무방합니다. 몸담은 회사를 무너뜨리면서도 승진을 이뤄내는 억지를 어떻게든 말이 되게 하려 갖고 온 것이 토익 점수였던 듯 싶습니다. 무거워야 하는 곳엔 가볍고 가벼워야 하는 곳엔 무거우려니 변명이 필요합니다.


 각자의 개성이야 둘째치고, 특정한 계층이나 집단의 대표자로 주인공들을 내세우기에는 그들의 조건과 상황이 지나치게 특수합니다. 때문에 영화의 이야기를 사회적 갈등으로 확대해 받아들이기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죠. 모든 조각이 맞춰질수록 그저 대리만 될 수 있다면 그 직함을 달아 주는 회사나 사람에게는 흐린 눈 떠 줄 준비가 너무나도 잘 되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불과해집니다.



 영화의 모든 구성 요소가 서로를 갉아먹습니다. 인물과 사건이, 예고편과 본편이, 심지어는 초반부와 후반부가 서로를 부정합니다. 좀 있어 보이는 그림을 만들겠다는 욕심만 순간적으로 도드라질 뿐, 유기적으로는 전혀 연결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따낸 타이틀이 부자도 사장도 영웅도 아닌 대리라니, 사원의 소박하지만 장대한 백일몽에 딱 어울리는 기승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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