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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Feb 03. 2021

<퀸스 갬빗> 리뷰

64칸 세상의 퀸


<퀸스 갬빗>

(The Queen's Gambit)

★★★★


 <더 보이즈>의 두 번째 시즌 이후 한동안 보지 않던 드라마에 다시 한 번 손을 댔습니다(?). 넷플릭스에서 그렇게 인기가 좋다는 <뤼팽>과 <퀸스 갬빗>을 감상했는데, 오마 사이의 <뤼팽>은 왜인지 첫 번째 시즌의 절반만 미리 공개한 뒤 나머지 절반은 공개 시기도 정해 놓지 않았죠. 어쨌든 함께 본 <퀸스 갬빗>의 경우 7부작이라 비교적 빠르게 주파할 수 있었습니다.



 때는 1950년대 말, 켄터키의 한 고아원에서 자란 우리의 주인공 베스 하먼. 사교성이라고는 없는 성격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생긴 안정제 중독까지, 첫 단추부터 영 덜컹거리는 구석이 많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들른 지하실에서 관리인 아저씨가 외로이 두던 체스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 간단하고도 복잡한 64칸의 판은 그녀의 모든 것을 바꿔놓게 되죠.


 체스를 소재로 한 작품은 토비 맥과이어가 주연을 맡았던 2014년작 <세기의 매치> 이후로 정말 오랜만입니다. 최근 할리우드에서 누구보다 주목받는 신예인 아냐 테일러 조이를 주인공으로 <해리 포터> 시리즈의 두들리 더즐리 역으로 출연했던 해리 멜링, 이미지 변신 차 기른 콧수염이 영 튀는 토마스 브로디 생스터 등 익숙한 얼굴들도 여기저기 들어가 있어 보기가 편안합니다.



 종종 호흡이 느려져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드라마 특성상 주인공의 이야기를 아주 천천히 풀어나갑니다. 회상으로 간단히 집어넣어도 될 성장 과정에도 에피소드를 통째로 할애하고, 주요 사건들의 떡밥을 여러 에피소드 전에 던져 두거나 여러 에피소드 후에 풀어나가는 등 퍼즐과도 같은 연출을 즐기죠. 똑똑한 주인공의 똑똑함을 중심에 둔 작품인 만큼 전개 역시 똑똑함을 즐기는 모습입니다.


 체스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한 발만 깊이 들어가도 영 생소하기도 합니다. 기본적인 규칙은 물론 유명한 선수, 그랜드 마스터라는 호칭 등 상식의 경계선에 걸친 개념들 탓이죠. 축구 경기에서 대포와 같은 중거리 슛으로 들어간 골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어렵고 대단한 것임을 알 수 있지만, 보드게임 등에서 흔히들 일컫는 묘수는 그것이 엄청나다는 사실조차 일정한 배경 지식을 요합니다.



 <퀸스 갬빗>은 바로 이 지점에서 많은 고민을 한 티가 납니다. 어렵고 생소한 것은 아예 설명하지 않아도, 혹은 줄줄이 설명을 읊어도 연출상의 요철이 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옆길도 답이 될 수 있습니다. 체스 경기와 수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대신, 베스가 상대하는 사람의 실력이 어떻고 레이팅이 어떻다며 한껏 띄워준 뒤 재능과 스타성으로 누르는 것을 보여주어 간접적인 상승을 유도하죠.


 그러면서도 아는 사람에게는 결코 소홀하지 않습니다. 체스라는 것이 또 잘 아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파고드는 분야인지라, 존재하지도 않는 외계 종족의 언어랍시고 아무 소리나 내고 지나가는 편법을 쓸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아마 체스계 역사상 가장 유명인일 가리 카스파로프를 포함한 여러 인사들의 조언 덕에 수 하나하나가 실제로 절묘하게 설계되고 묘사되어 있다고 하죠.



 이렇게 체스 쪽은 정리가 끝났으니 캐릭터 쪽을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모든 사건의 중심엔 아냐 테일러 조이의 베스 하먼이 있죠. 재능부터 외모에 이르기까지 타고난 것이 꽤나 많은 인물입니다. 체스란 것을 처음 배운 시점에서부터 꽤 오랜 기간 동안 무패 신화를 기록했고, 그런 어마어마한 실력에 자존감 내지는 거만함이 맞물려 꽤 매력적인 성장형 캐릭터를 완성합니다.


 다시 말해 누구나 이 캐릭터를 처음 접하는 순간부터 앞으로 향할 인생 곡선이 그려지는 인물입니다. 타고난 실력을 갈고 닦으며 불도저처럼 전진하지만, 그 과정에서 굉장히 드물 수밖에 없는 좌절을 겪으며 미처 갖지 못했던 미덕까지 갖추게 되는 그림이죠. 성격도 버릇도 결코 곱지 못한 터라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도 같은 주변 조력자들의 존재와 도움이 절실하기도 합니다.



 이는 중반부 이후 급부상하는 <퀸스 갬빗>의 특징이자 단점이기도 합니다. 샤이벌을 시작으로 해리 벨틱, 베니 와츠, 졸린, 심지어는 바실리 보르고프에 이르기까지, 극중 등장하는 모든 주조연들은 성격이나 개성에 무관하게 베스에게 맹목적으로 우호적입니다. 베스가 개차반처럼 굴건 말건 조언과 도움은 물론 자신의 모든 것을 퍼주길 주저하지 않습니다.


 <퀸스 갬빗>이 실화가 아닌 월터 테비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가상의 이야기임이 드러나는 가장 분명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한 명만 있어도 과분한 인생의 멘토와 동료들이 베스의 삶엔 넘쳐납니다. 초중반부에 비해 후반부 전개가 지나치게 손쉽고 단순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뭘 어떻게 굴어도, 술과 약에 취해 바닥을 굴러다녀도 가마를 태워 왕좌에 앉혀 줄 사람이 널리고 널렸습니다.



 무빙워크를 방불케 하는 이 과정 탓에 베스의 개성 또한 약화됩니다. 특정 시점부터는 주변 인물들에 더해 안정제 중독이나 고아원 출신이라는 본인의 설정마저도 말 그대로 화이트 퀸으로 거듭나는 베스 하먼의 변신을 더욱 대단하게 보이게 하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되죠. 더 깊은 바닥에서 출발할수록 도달한 높이가 대단해 보이는 효과를 노린 결과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효과가 있습니다. 언뜻 무한해 보이지만 실은 유한한 체스 판 위 경우의 수처럼, 타고난 재능을 위대함으로 옮긴 체스 플레이어가 있다면 걸었을 법한 길을 보기 좋고 즐기기 좋게 꾸며냈습니다. 실화의 힘을 빌릴 수 없다면 장르물의 힘을 갖추면 될 일입니다. 로맨스나 신파 등 응당 관심을 가질 만한 살은 과감히 쳐낸 뒤 뼈대를 강화하길 선택했죠.



 명목상 '시즌 1'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는데다 마음만 먹으면 새로운 동료와 새로운 적수를 만들어 무한대로 늘릴 수 있겠지만, 기승전결을 보면 아무래도 두 번째 시즌을 기대할 만한 작품은 아닌 것 같죠. 그럼에도 2020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중에서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고, <더 위치>와 <23 아이덴티티>를 표류하던 아냐 테일러조이의 대표작 자리를 꿰찬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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