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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Mar 17. 2021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리뷰

용하려고 용쓰기만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Raya and the Last Dragon)

★★☆


 <소울>로 극장가에 활기를 불어넣는 데 성공한 디즈니가 바로 다음 타자를 내놨습니다. <빅 히어로 6>의 돈 홀과 뮤직 비디오 감독 출신의 카를로스 로페즈 에스트라다가 힘을 모은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이죠. 성우진으로는 <스타 워즈: 라스트 제다이>의 켈리 마리 트란을 필두로 아콰피나, 다니엘 대 킴, 젬마 찬, 산드라 오, 베네딕트 웡, 앨런 터딕 등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인간과 드래곤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신비의 땅, 쿠만드라 왕국.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삼키는 악 '드룬'이 들이닥치자, 드래곤들은 스스로를 희생하고 전설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드래곤 젬은 탐욕의 대상이 되어 인간들을 갈라놓고, 그를 둘러싼 세력 다툼을 기어이 드룬의 부활을 촉발하죠. 그렇게 우리의 주인공 라야는 젬을 다시 모아 드룬을 저지하고 쿠만드라를 수호하기 위해 나섭니다.


 판타지 세계관의 교과서나 다름없는 전개입니다. 고대의 악을 잠재운 전설의 누군가가 유물을 남기고, 그를 수호하던 세력은 수백 년의 세월에 방심해 절체절명의 위기를 부릅니다. 그 와중에 단결해도 모자랄 우리의 주인공들은 유물의 힘에서 비롯된 각자의 이해관계를 따지며 갈등하지만, 깊은 수렁에서 탈출하려면 서로가 믿음으로 서로의 손을 잡는 수밖에 없죠.



 달라지는 것은 세계관에 씌우는 껍데기뿐입니다. 동남아 분위기 물씬 나는 소품과 색채에 아시아권에서 통용될 법한 장치들을 이리저리 덧댑니다. 목소리 연기에 나선 배우들도 모두 아시아계로 캐스팅하고, 쿠만드라, 시수, 드룬, 라야 등 작명도 이 쪽 동네 느낌 나게 깔아두었습니다. 갓 비스무리한 모자 하나씩 쓰고 물 위를 떠다니는 아시아의 모습에 아주 큰 영감을 얻은 듯 싶습니다.


특정한 문화권을 토대로 영화를 구성하는 것은 의외로 꽤 모험적인 접근입니다. 특히 주체가 할리우드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알려지지 않았던 아름다움을 발굴한다고 바라볼 수도 있지만, 조금만 비껴가도 해당 문화권을 향한 할리우드와 서양의 편견을 새삼스레 재확인할 수 있는 탓이죠. 물론 애초에 받아들이는 쪽이 삐딱하면 어떻게 묘사해도 불만이 나오기도 합니다.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그 지점에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쿠만드라를 다섯 개로 쪼개 어느 하나 무시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남기려 최대한 많은 고정관념들을 형상화하죠. 부족별 의식주 문화를 뚜렷하게 갈라 자신들이 다루는 대상의 어느 한 지점에만 머무르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합니다. 이리저리 벌어지는 추격전을 보고 있으면 처음부터 게임 스테이지를 구상하며 만들었다고 생각할 지경입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그럴듯하게 꾸며둔 무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세상을 멸망시킬 악이 창궐하고 그 악을 막을 유일한 유물에 운명이 걸려 있다는 둥 수식어는 대단하지만, 막상 흘러가는 그림은 어린이 장난 수준이죠. 환상이나 헛소리 취급받던 드래곤이 뚝딱 부활하는 순간부터 예견된 불길함은 다섯 조각짜리 퍼즐을 맞추듯 긴장감 따위는 없는 손쉬움으로 번집니다.



 중심이 되는 줄기가 쉬우니 이마저도 저지하려는 갈등은 시간 낭비에 불과합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미로에서야 눈 앞에 장애물이 튀어나오면 손에 땀부터 흐르겠지만, 앞으로나 옆으로나 뻥뻥 뚫린 고속도로에서라면 거기에 걸리는 게 아둔한 것이겠죠. 그래 놓고는 그거 넘었다고 우리의 신뢰가 어떻고 믿음이 어떻다니 연설을 하고 있으면 당연히 귀에 제대로 들어올 리 만무합니다.


 당장 주인공인 라야부터 아무런 힘도 개성도 없는 마당에 툭툭이나 노이처럼 대놓고 상품화만을 노린 캐릭터들이 늘어나면 곱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드래곤 젬이나 드룬처럼 근본도 없이 그냥 세상을 구하고 그냥 세상을 파괴한다는 설정에 이름만 붙인 요소들로는 누구의 행적도 설득할 수 없구요. 뒤통수를 몇 대고 맞았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또 믿는 것이 넓은 인류애라는 귀결도 참으로 만화적입니다.



 어느 모로 보나 표값은 본편 시작 전 나온 5분짜리 단편 <우리, 다시(Us, again)>에 냈다고 생각해야 속이 덜 쓰립니다. <토이 스토리 4> 때부터 도무지 주체하지 못하는 광원 효과나 여기저기 쏟아붓는 물, 형형색색 드래곤으로 기술력 자랑에만 여념이 없죠. 보다 보다 볼거리에 취해 내용물을 잊었다는 말을 천하의 디즈니 영화에 하게 되는 날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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