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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Mar 30. 2021

<자산어보> 리뷰

잠기며 가라앉거나 묻으며 나아가거나


<자산어보>

★★★★


 2018년 <변산> 이후로 간만에 돌아온 이준익 감독의 신작, <자산어보>입니다. 설경구와 변요한을 중심으로 이정은, 민도희, 강기영, 류승룡, 김의성, 정진영, 조우진 등 화려한 면면들이 함께했죠. 전작 <동주>와 마찬가지로 흑백으로 제작되었으며, 총제작비 45억을 들여 손익분기점은 관객수 120만 명으로 잡혀 있다고 합니다. 다행히 위축된 지금의 극장가에서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수치죠.



 서학에 빠졌다는 죄목으로 세상의 끝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 그 곳에서 바다 생물에 매료된 그는 책을 쓰기로 결심하고, 바다를 훤히 알고 있는 청년 어부 창대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단칼에 거절당합니다. 창대가 혼자 글 공부를 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게 된 정약전은 서로의 지식을 거래하자고 제안하고,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의 스승이자 벗이 되어가는 둘의 동행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사극은 크게 특정 인물의 일대기를 그리는 작품과 굵직한 사건을 다루는 작품으로 나뉩니다. 인물에도 사건이 있고 사건에도 인물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어떠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지점이 있기 마련이죠. 이는 다시 세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경우, 그리고 이미 잘 알려진 것의 가려진 부분을 드러내거나 재해석을 시도하는 경우로 나뉘구요.



 그러다 가끔씩 제 3의 길을 시도하는 작품들이 나옵니다. 언급한 길을 밟는 동시에 이를 보여주는 외따로의 이유를 분명히 하는, 다시 말해 영화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특정한 사건 내지는 인물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영화가 있죠. 보통은 기승전결 똑바로 보여주기도 영 쉽지 않은 탓에 난이도가 꽤 높은 편입니다. 가장 최근 작품 중에서는 2017년 <남한산성> 정도가 있겠네요.


 그리고 이번 <자산어보>가 4년만에 그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영화는 흑산도로 유배를 온 정약전과 토박이 청년 창대의 신비한 물고기 사전(?) 집필기에서 출발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과 아래에서 위를 꿈꾸는 사람의 신분을 초월한 우정을 상상할 수 있죠.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흐뭇한 그림이지만, 굳이 이 인물과 이 사건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때문에 <자산어보>는 한 발 더 나아갑니다. 학문에 정진하고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묻습니다. 그렇게 배워서 뭐 할 거냐는 질문의 가장 근원에 접근합니다. 정약전은 그토록 잘 배우고 많이 배웠다는 자들에게 치였습니다. 그런 그의 눈엔 공부해서 사람 구실 좀 하겠다는 창대의 올곧음마저도 끝내 자신을 가로막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그림자로 물들 것이 뻔해 보이죠.


 하지만 창대는 세상이 정말 그럴 것이라고 믿지 못합니다. 책에는 이토록 구구절절 옳은 말만 빽빽히 들어차 있는데, 이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모여 있으면 세상이 올바르게 굴러가는 것이 당연지사입니다. 만일 정말 잘못되어 있다 한들 자신부터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면 무언가 바꿀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모두가 끝을 아는 걸음에도 일단은 나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산어보>는 이처럼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 가는, 세상이 조금씩 바뀌어 가는 동력에 주목합니다. 해도 안 될 것이라는 사람 앞에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 곳엔 희망이 있습니다. 쓸 때는 색이 뚜렷하지만 이내 날아가고 마는 갑오징어의 먹물이 있으면 어느새 날아오를 준비를 마치고 성게 안에서 날개를 펴는 파랑새도 있는 법입니다.


 이를 풀어내고 제 3자에게 들려주는 방식 또한 지극히 친절합니다. 삶은 옥수수의 맛을 본 정약전이 옥수수의 종자가 좋아서 맛이 좋다고 이야기하자, 옥수수를 내 온 가거댁은 그걸 기른 밭을 비롯한 환경이 좋아서 그런 것이라 이야기하죠. 여기까지만으로도 신분제를 비유했음을 얼추 짐작할 수 있지만, 영화는 여기에 몇 마디 대화를 이어붙여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주 확실히 하는 식입니다.



 옳음을 이야기하면서도 옳지 못함을 맹목적으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 둘의 구분이 절대적이지 않은 탓입니다. 영역에 따라, 상황에 따라, 시기에 따라 누구든 옳은 사람일 수도, 옳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를 바라보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여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구분의 결과가 아니라 구분을 끝내지 않으려는 그 노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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