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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Mar 31. 2021

<더 파더> 리뷰

잊혀짐마저 잊혀지는 순간


<더 파더>

(The Father)

★★★☆


 본국 프랑스에서 각본가로 활발히 활동하던 플로리안 젤러의 장편 감독 데뷔작, <더 파더>입니다. 안소니 홉킨스, 올리비아 콜먼, 마크 개티스, 올리비아 윌리엄스, 이모겐 푸츠, 루퍼스 시웰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한데 뭉쳤죠. 얼마 전 발표된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군에서 남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포함한 6개 부문에 이름을 올리며 벌써부터 꽤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런던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는 안소니. 아침이면 뜨는 해를 맞이하며 차도 한 잔 하고 늘 찾아오는 딸 앤의 안부를 묻는 것이 그의 일과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앤이 갑작스레 파리로 이사를 간다고 선언합니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이전 간병인 이야기를 하며 새 간병인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앤이, 그녀의 남편이, 그리고 모든 것이 조금씩 서로 뒤섞입니다.


 치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잊고, 또 잃고 마는 병입니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뿌리채 쥐고 흔드는 병이기도 합니다. 치매를 소재로 하는 영화들은 대부분 치매 환자의 주변인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춥니다. 기본적인 기승전결은 멀쩡한 전개 구조를 갖추어야 하고, 그러다 보니 치매라는 질병의 고통은 관객들에게 간접적으로 전달되곤 하죠.



 <더 파더>는 대담하게도 치매 환자 본인에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지금껏 살아 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억의 큰 부분을 차지한 것들이 당장의 현실과 뒤섞입니다. 인물과 사건은 물론 시간의 순서도 제멋대로 뒤섞입니다. 분명히 방금 보았습니다. 아까 들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아니라고 합니다. 장난을 치는 줄 알았는데 얼굴들이 심각합니다. 따라 웃다가도 조금씩 무서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치매 환자의 주변인이 아닌 본인의 감각을 중심에 놓습니다. 조금씩 말이 안 되던 일상이 어느새 완전히 뒤엉켜 누구도 도와 줄 수 없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곳으로 향합니다. 모든 상황의 앞뒤가 맞춰지지 않는다는 의문은 아주 천천히 절망으로 바뀌어 갑니다. 자꾸 헛소리를 하는 건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발 밑의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감아쥡니다. 동정과 연민부터 공포까지 나아갑니다. 안소니가 겪는 혼란과 좌절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혹은 나 자신의 모습일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많은 연출을 대신합니다. 막상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비슷한 상황의 단순한 반복에 지나지 않지만, 순간과 순간이 각자의 기억 속 다른 파편들을 만나 저마다의 색깔을 가져갑니다.


 실명 그대로의 캐릭터를 연기한 안소니 홉킨스의 존재감은 러닝타임의 경과와 함께 거대한 사자후로 퍼져갑니다. 배우와 캐릭터가 한데 섞이며 스크린이라는 경계를 능동적으로 무너뜨립니다. 가족을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단단한 기둥 역할을 했을 자신이 유약해져만 가고, 멈출 수 없이 굴러 맞이한 종국에 터져나오는 두려움의 표현은 안소니 홉킨스라는 배우의 기준에서도 경이로울 따름이죠.



 지금까지의 영화들은 다양한 종류의 불편함을 다루어 왔지만, <더 파더>에서 피어오르는 불편함은 꽤나 새롭습니다.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지만 나타나면 피할 수 없고, 어떤 절실한 노력으로도 이를 막거나 다스릴 수 없다는 무력감이죠. 희망 혹은 절망 중 어떤 길도 택하지 않은 영화가 선사하는 감정의 무게만으로도 이토록 숨을 쉬기가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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