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에서 막장으로
2015년 <강남 1970> 이후 6년만에 돌아온 유하 감독의 신작, <파이프라인>입니다. 최근 드라마에서도 호흡을 맞추고 있는 서인국과 이수혁을 중심으로 음문석, 유승목, 태항호, 배유람, 배다빈 등이 출연했죠. 소위 말하는 '꾼'들이 팀을 꾸려 하나의 작전을 수행하는 도둑질 영화로, 기름을 훔친다는 뜻의 '도유'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손만 대면 대박을 터뜨리는 업계 최고의 천공 기술자 핀돌이. 어느 날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물주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으로 수천억어치 기름을 훔칠 거대한 작전에 참여하게 되죠. 그렇게 프로 용접공 접새, 땅 속을 장기판처럼 꿰고 있는 나과장, 괴력의 인간 굴착기 큰삽, 이 모든 이들을 감시하는 카운터가 모여 서로에게 속고 속이는 희대의 도둑질이 시작됩니다.
도둑질 영화의 매력 포인트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작전의 교묘함과 그를 만들어나가는 인물들의 관계도죠. 장르 자체의 진입 장벽이 비교적 높았을 시절에야 전자의 존재감이 더 컸겠지만, 대충 만능 해커 하나 끼고 뚝딱 해결해 버리는 요즘엔 후자의 중요성이 점점 대두되고 있습니다. 훔치는 모양새가 거기서 거기니 다른 곳에서 더 큰 차별점을 만들 필요도 크구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후자도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이면 얼굴, 능력이면 능력, 화술과 대담함까지 갖춘 주인공을 중심으로 개그부터 연인까지의 역할을 나눠 받은 캐릭터들이 공장에서 생산된 것이죠. 관객들의 신물이 모이고 모여 선수 입장물이라는 단어까지 탄생했을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일정 수준 이상의 흥행을 보장하며 제작사들의 도전 정신(?)을 자극했죠.
그걸 악순환이라고 보았을 때 이번 <파이프라인>은 그 최저점에 위치한 영화가 될 겁니다. 몇십 몇백 억이라며 제멋대로 부른 숫자는 물론 그를 감당할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엉성한 작전, 서로 언제 봤다고 동료애가 샘솟았다가 남이 되기를 널뛰듯 반복하는 주조연, 어설프기로는 애들 장난이라는 말도 아까운 위기 창출까지, 눈에 걸리길 반복하다 보면 어느 시점부터는 정말로 당황스럽기에 이릅니다.
뼈대만 만들고 살을 붙이지 않은 건지, 살만 만들고 뼈대를 세우지 않은 건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인물이나 사건 중 어느 한 쪽에 집중했다고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각본이 300쪽이라고 한다면 이 중 3분의 2인 200쪽을 임의로 골라 없애 버리고 남은 100쪽만으로 영화를 만든 느낌입니다. 없어야 하는 장면은 있고 있어야 하는 장면은 없으니 일관적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들이 처음 만나 팀워크를 쌓아가는 과정 따위는 과감히 생략되어 있지만, 통편집해도 무방한 독립적인 개그 씬은 들어가 있습니다. 너무나 어설프고 작위적이라서 당연히 극중 다른 누군가를 속이려고 미리 꾸민 연극인 줄 알았던 장면이 진짜로 벌어지고 있었던 진지한 장면이라 충격받기도 지칩니다. 주인공들만 두고 보기도 힘든데 악당이나 경찰이 개입하면 균열은 걷잡을 수 없습니다.
영화 도입부 자막으로 극중 등장하는 도유 관련 사실들이 창작된 것임을 밝히는데, 돌이켜보면 모방 범죄나 미화를 우려한 장치가 아니라 허술하디 허술한 각본의 변명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웬 전동 킥보드는 PPL을 거하게 하려는지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 타고, 작업 중인 땅굴에서 타고(!), 경찰이 쫓아올 때도 다른 이동수단 놔두고 타니(!) 몰입 부수기로는 안마의자가 선녀로 보입니다.
배우의 연기나 감독의 역량 등 선을 한 번만 넘으면 그냥 실망스러운 영화라고 치부할 텐데, 거기서 한 번 더 넘어가니 무언가 피치 못할 다른 사정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듭니다. 완성된 영화는커녕 예고편 하나 겨우겨우 만들어낼 허장성세 가득한 대사와 장면들로는 어떤 동종 영화들과 붙어도 비교 열위를 가져갈 수밖에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