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없는 낱장들
<아포칼립토>의 제작자이자 작가였던 P.B. 셰므란(파르하드 사피니아)의 감독 데뷔작, <프로페서 앤 매드맨>입니다. <아포칼립토>의 감독이었던 멜 깁슨이 숀 펜과 함께 주연을 맡았고, 에디 마산과 나탈리 도머, 스티브 쿠건, 제레미 어바인, 스티븐 딜레인, 이안 그루퍼드, 제니퍼 엘 등이 출연했습니다. 2019년 작품이지만 국내엔 이제서야 수입되어 정식 개봉되었네요.
빅토리아 시대, 대영제국의 부활을 위해 세상을 정의할 옥스퍼드 사전 편찬 프로젝트가 시작됩니다. 콧대 높은 귀족들의 은근한 반대에도 괴짜 교수 제임스 머레이가 책임자로 부임하고, 그는 영어를 쓰는 모든 이들로부터 단어를 모으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죠. 어느 날 도저히 한 사람의 작업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수준의 편지들이 도착하지만, 이내 밝혀진 그의 정체는 많은 사람들을 위협하게 됩니다.
'교수와 광인'이라는 제목에 꽤 충실합니다. 정말 교수가 주인공인 이야기 하나와 광인이 주인공인 이야기 하나가 병기되어 있습니다. 이 둘의 이야기는 <말모이>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사전 편찬 프로젝트라는 공통 분모로 엮이게 되지만, 그러기까지엔 영화가 시작하고서도 의외로 오랜 시간이 소요되죠. 사건으로 묶이지만 결국에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아야 합니다.
바로 여기가 <프로페서 앤 매드맨>의 시작점이자 한계점입니다. 전혀 접점이 없어 보였던 두 사람의 인생 곡선이 마치 기적처럼 만나 또 다른 기적을 낳지만, 두 사람 모두 영화적으로 결코 놓칠 수 없는 소재의 주인공입니다. 창작의 불꽃을 피워올리기 딱 좋은 동시에 일관된 기승전결을 빚어나갈 고도의 실력을 요구하는 재료입니다.
실제로 두 사람 각자의 이야기는 모두 흥미롭습니다. 한 쪽엔 길거리 출신이 오로지 실력과 재치만으로 높으신 분들의 콧대를 꺾어 놓는 통쾌함이 있고, 다른 한 쪽엔 살인자이면서 천재인 개인의 내면을 통해 도덕을 자문하게 하는 깊이가 있습니다. 외따로의 영화 하나씩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죠. 멜 깁슨과 숀 펜이라는 묵직한 배우들 덕에 몰입도도 굉장하구요.
그러나 이 둘을 엮는 구심점의 힘은 영화의 중반부부터 벌써 기력을 다합니다. 사전 편찬은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시작인 동시에 끝일 뿐, 영화를 관통하는 소재라고 하기엔 윌리엄 마이너 쪽에서 갖는 의의가 꽤 약합니다. 그럼에도 영화는 마지막 순간에 윌리엄 쪽으로 한껏 기울었던 영화의 균형추를 끝내 되돌리며 마치 지금까지 본 이야기가 모두 사전 제작기의 일부였던 것처럼 급히 마무리하죠.
영화의 주인공은 제임스 머레이가 아니라 윌리엄 마이너여야 했습니다. 제임스 머레이를 주인공으로 놓았을 땐 나탈리 도머의 엘라이자나 에디 마산의 먼시, 스티븐 딜레인의 브레인 박사 등 124분의 러닝타임에서 꽤 많은 비중과 잔가지를 담당하는 조연들이 존재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반면 제임스 머레이의 가족이나 동료 등은 잘라내도 전개나 메시지에 끼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미미하구요.
아무래도 제임스 머레이 혹은 멜 깁슨의 존재감을 필요 이상으로 높이 평가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덕분에 끝까지 서로 연관성이 없는 인물들의 온갖 개인사가 교차하며 산만해졌습니다. 사전 이야기도 하고 싶고 영국 역사 이야기도 하고 싶고 사랑과 도덕 이야기도 하고 싶은 욕심이 캐릭터의 생명력에 투영되어 서로를 방해하는 그림이 되고 말았죠. 영화가 아니라 책이나 드라마에 어울리는 구성입니다.
덕분에 정작 영화가 표현하고 싶었던 사전 이야기는 빈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임스 머레이가 여러 사람들에게서 단어를 모으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윌리엄 마이너가 거기에 지대한 기여를 일회적으로 했다는 사실뿐, 그 이외의 인물이나 과정은 묘사되지도 않은 채 급히 마무리되니 감상의 초점을 잡기조차 쉽지 않죠. 지휘와 감독의 중요성을 어필하는 영화의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