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드리면 죽는다는 물리 법칙
1998년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는 가이 리치의 감독 데뷔작이자 제이슨 스타뎀의 배우 데뷔작이었습니다. 커리어 역사를 함께한 두 사람이 다시 뭉친 영화가 바로 이번 <캐시트럭>이죠. 본토 제목은 '남자의 분노'쯤으로 중간에 바뀌었지만, 수입사에서는 기존 제목을 고수하기로 한 모양입니다. 홀트 맥칼라니, 조쉬 하트넷, 스콧 이스트우드, 앤디 가르시아, 에디 마산, 포스트 말론(!)도 함께했네요.
H라는 이름으로 현금 수송 회사에 취업한 한 남자. 신체검사부터 사격까지, 합격선에 턱걸이한 실력으로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현장에 투입된 첫날부터 무장 강도들에게 습격을 당하고, 베테랑들조차 혼비백산한 와중 미동조차 없는 손으로 모두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죠. 그렇게 서서히 밝혀지는 그의 정체와 과거엔 누구도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슬픔과 분노만이 가득합니다.
감독 가이 리치와 배우 제이슨 스타뎀 둘 다 이제는 일종의 장르가 된 이름들입니다. 남자 냄새 가득하다는 것이 공통 분모가 되기는 하지만, 전자가 유머와 화면 연출을 강조했다면 후자는 아드레날린과 액션 쪽에 가깝습니다. 이는 할리우드에서 갖는 두 사람 각자의 위상과 비례해 왔고, 간만에 조우한 둘이기에 과연 어떤 쪽의 색이 더욱 진하게 묻어날지도 기대의 일부였죠.
공교롭게도(?) 디즈니와 함께한 <알라딘>은 가이 리치의 영화들 중 가장 가이 리치답지 않았다는 이야기에도 커리어 사상 최고 흥행에 성공했고, 그래서인지 그 직후 작품이었던 <젠틀맨>에선 본인의 유머와 마초 향기를 한껏 되살렸습니다. 데뷔작 조합이었던 제이슨 스타뎀과 다시 뭉친 이번 <캐시트럭>은 거기서 또 한 발 나아가 정말로 진중한 작품에 도전한 것처럼 보이구요.
그 결과 <캐시트럭>은 지금까지의 어떤 가이 리치 영화들보다 더욱 묵직합니다. 넉살 가득한 유머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시종일관 <다크 나이트>가 떠오르는 무거운 음악을 깔아둔 채 어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죠. 겉으로는 차갑지만 속은 누구보다 따뜻한, 그러나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말 그대로 '남자의 분노'를 내뿜는 그 에너지 자체에 초점을 맞춥니다.
때문에 일반적인 액션 영화의 쾌감을 기대하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제이슨 스타뎀이라는 이름값을 한껏 살린 원샷원킬 액션은 이따금씩의 양념이 될 뿐, 중반부를 포함한 대부분의 러닝타임은 캐릭터 자체의 무게감으로 각본을 지탱합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선에서 차갑디 차가운 분노를 동력 삼아 움직이는 남자의 극한을 표현하려 노력하죠.
다만 영화의 균형추가 완벽히 맞춰져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들을 잃고 혈혈단신으로 끝까지 가는 H의 이야기는 짧고 명료하기에 파생될 것이 많지 않고, 액션의 규모도 그리 크지 않죠. 때문에 H의 주변 인물들이 이리저리 엮인 플래시백으로 러닝타임을 채우는데, H의 첫인상과 능력치가 워낙 출중한 덕에 굳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거나 설명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이자 선역의 존재감은 H 한 명이 독점하는 반면, 그와 대립하는 세력의 그림자는 여러 상황의 여러 인물들에게 나뉘며 거물 대 거물이라는 구도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시작과 동시에 H가 이 사람들쯤은 손쉽게 궤멸시키리라는 그림이 아주 빤하게 그려지죠. 스콧 이스트우드의 잰은 캐릭터로 보나 연출 의도로 보나 단일 악역 자리를 가져가기에는 힘이 많이 부족합니다.
가진 재료도 훌륭하고 그를 다루어야 하는 방법도 잘 알고 있었지만, 둘 다 워낙 특수하고 독보적인 탓에 긍정적인 시너지를 내기가 영 까다로웠습니다. 지독히도 현실적인 복수극이라고 하기엔 총을 몇 발씩이나 맞고도 멀쩡하게 걸어다니는 등 별 설명 없이 편한 길을 걸어가기도 하죠. H가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면 그의 업적과 영웅적인 면모를 기리는 위인전쯤으로 보아야 맞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