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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Jun 11. 2021

<애플> 리뷰

기억을 기억할 때까지


<애플>

(Apples)

★★★★


 그리스 태생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의 장편 데뷔작, <애플>입니다. 강렬한 포스터와 '제 2의 요르고스 란티모스'라고 적힌 국내 카피까지, 예술 영화를 눈여겨보던 관객들의 관심이 갈 수밖에 없던 작품이죠. 비록 익숙한 이름들은 없지만, 바로 그 케이트 블란쳇이 제작자로 참여하면서 홍보 포인트 하나를 더 늘리기도 했습니다. 국내엔 지난 5월 26일 개봉되었네요.



 원인 모를 단기 기억상실증이 유행하는 세상,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잊은 사람들을 위해 국가에서 새출발 프로그램을 만듭니다. 우리의 주인공 또한 갑작스런 발병으로 프로그램의 참여자가 되고, 하루하루 주어지는 임무 겸 치료를 통해 기억을 되살리려 하죠.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안나를 만나며 조금씩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들어보려 합니다.


 정적이고 불친절한 것이 딱 진입 장벽 높은 예술 영화의 조건에 부합합니다. 호흡은 느리고 인물도 많지 않음에도 기본적인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만도 쉽지 않습니다. <더 랍스터>나 <킬링 디어> 덕에 예술영화 감독들 중 가장 상업적인(?)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이름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스틸컷만 보아도 영화의 장면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인스타그램용 감성 사진들처럼 보이죠.



 망각은 새로움을 전제합니다. 잊었기에 새로이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매력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중독적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축복이자 다른 누군가에게는 형벌인 그것이 사람들에게 피어오릅니다. <애플>이 다루는 기억상실증은 얼핏 치매와 같지만, 기본적인 언어 능력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잊어버리며 완전한 새출발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데에서 훨씬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뒤돌거나 바라볼 용기조차 나지 않는 기억이 있습니다. 존재만으로 내 삶에 필요 이상의 영향을 끼치고, 시간이 지날수록 잊혀지기는커녕 생명력을 키워 나의 자아를 뒤덮는 기억이죠. 완전히 덮었다고 생각한 순간, 드디어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순간 더욱 커져 전보다 더 많은 곳을 더욱 악랄하게 갉아먹습니다. 너무 이른 것도, 너무 늦은 것도 없이 악순환만이 계속됩니다.


 사실 해결책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와 눈을 맞추고 응시해야 합니다. 내가 갖고 있고 앞으로 가질, 다시 말해 그 기억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모든 것을 걸고 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더 이상 나의 일부를 가져가게 두지 않겠다는 각오만이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래야 하는 순간에 그럴 용기를 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고개를 떨구고 시선을 돌립니다.



 <애플>은 바로 그 교차로를 파고든 영화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기억상실증은 그 어려운 용기를 대신합니다. 기억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며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하루하루가, 1분 1초가 지난 기억으로 괴로운 사람의 눈엔 그만큼 손쉽고 고마운 병이 또 없습니다. 원인도 이유도 모르지만 일단 걸리기만 하면 더 이상의 고통은 갖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초점을 두는 곳에 따라 기승전결의 생김새는 조금 달라집니다. 정확히는 영화가 보여주는 주인공의 설정을 해석하기에 따라 같은 장면도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죠. 그러나 어느 쪽이든 뿌리와 방향은 같습니다. 외면한다고 떨어질 수 있는 기억은 기억이 아닙니다. 코끼리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가 떠오르는 게 당연하다던 모 영화의 대사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불친절한 듯 하지만 의외로 힌트가 많은 영화입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넘어가는 대신 발이 걸릴 지점을 동종 영화들에 비해 많이 마련해두었습니다. 덕분에 초보자의 발걸음으로 서투르게 쫓아가다가도 무언가 주워담을 것들이 발견되고, 그를 짜맞추면 앞과 뒤의 길이 보이는 영화입니다. 여러모로 앞으로 여러 영화 팬들이 소중히 여기는 리스트의 숨은 단골이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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