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킴지 Aug 31. 2021

<레미니센스> 리뷰

미화시켰으니 추억이라는 생떼


<레미니센스>

(Reminiscence)

★★


 맨 중의 맨 휴 잭맨과 레베가 퍼거슨, 탠디 뉴튼, 클리프 커티스, 오언조 등이 힘을 합친 <레미니센스>입니다. 동생이자 각본가 조나단 놀란, 부인이자 제작자 엠마 토마스와 함께 바로 그 크리스토퍼 놀란 사단을 이루고 있는 각본가 리사 조이의 감독 데뷔작이죠. 남편인 조나단 놀란과 함께 집필한 TV 시리즈 <웨스트월드>를 흥행시키며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는 데에도 성공했습니다.



 해수면의 상승으로 도시의 절반이 바다에 잠긴 가까운 미래. 기억을 체험할 수 있는 장치를 운용하는 탐정 닉은 오늘도 매혹적이지만 중독적인 사람들의 과거에 몸을 담습니다. 늘상 단조롭기만 하던 닉의 인생은 귀걸이를 찾으러 온 새 고객 메이의 등장으로 180도 바뀌죠. 운명이라 여겼던 사랑도 잠시, 어느 날 사라져 버린 그녀의 흔적을 쫓던 그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커다란 음모와 마주합니다.


 생각나는 영화들이 많습니다. <블레이드 러너>처럼 암울함과 네온사인으로 장식된 미래 도시에서 <인셉션>처럼 사람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특수한 기기가 등장합니다. 물에 잠겨들어가는 도시부터 머리에 기구를 쓰기만 하면 과거의 원하는 지점을 얼마든지 들여다볼 수 있는 장치까지, 깔아놓은 판은 넓고 잠재력은 더욱 크니 어느 쪽으로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거기서 <레미니센스>는 애석하게도 로맨스를 택합니다. 물론 SF와 로맨스의 결합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랑이나 호감은 등장인물이 달리기 시작하는, 혹은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되어 더욱 위대하고 대단한 과업을 달성하는 동력으로 작용합니다. 그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의 시대를 막론한, 그토록 발전한 미래에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를 되새기게 되죠.


 그러나 <레미니센스>의 로맨스는 지독히도 1차원적입니다. 극초반부부터 불쑥 튀어나온 초면의 상대와 세기의 사랑에 빠지더니 몇 장면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사라졌다며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립니다. 관객들은 아직 닉이라는 인물을 파악하지도 못한 시점이죠. 그의 말처럼 실종인지 도망인지, 혹은 그냥 호구(?)인지조차 반신반의한 상황에서 쏟아지는 전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영화는 닉이 지금껏 어떤 관계를 맺어 왔고 또 어떤 삶을 살아 왔기에 순간의 인연에 이토록 열중하는지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를 의도적으로 숨기며 호기심을 유발한 것이 아니라, 첫눈에 운명의 사랑을 만났다는 설정을 아주 어설프게 표현했음이 서서히 드러난다는 것이죠. 당연히 부연 설명이 따라붙어야 하는 전개의 빈 공간에 사랑은 위대하다는 외침을 맹목적으로 덧붙이기만 합니다.


 중반부에 접어들 즈음 이미 빠르게, 그리고 당황스럽게 소진된 밑천에 영화는 뜬금없는 정치 스릴러를 끼워넣습니다. 알고 보니 메이의 실종 뒤엔 도시를 집어삼킬 지역 유지의 비밀이 고구마 줄기처럼 연결되어 있었다는 설정이죠. 어째 둘의 사랑과는 별 연관도 없어 보였던 도시의 실정이나 풍경이 하나씩 튀어나오더라니, 알고 보니 후반부 전개의 복선이었다며 스스로만 흡족해하는 그림입니다.



 등장인물들은 쓸데없이 많으면서도 전혀 조화롭지 못합니다. 닉과 메이의 사랑 이야기에 자꾸 필요도 없는 조연이나 엑스트라들의 사연을 집어넣고는 사실 이 모든 것이 서로와 연결되어 있었다며 절묘함을 강요합니다. 애초에 첫 단추부터 제대로 끼운 게 맞나 되돌아보고 싶은 와중에 아랫단엔 지퍼와 찍찍이를 달아 놓고는 이것이야말로 미래지향적 스타일이라며 자화자찬하는 격이죠.


 서로 아귀가 들어맞지도 않는 퍼즐 조각들을 늘어놓은 뒤 자신이 원하는 완성품을 만들어내려 억지로 끼우고 자르기만을 반복합니다. 이 쪽 설정은 남고 저 쪽 설정은 모자랍니다. 물에 가라앉는 도시, 과거를 들여다보는 장치 등 지나치게 큰 잠재력 탓에 이 영화의 주인공만을 위한 것으로 조심스레 가다듬어야 할 요소들이 그저 보기 좋고 나아가기 쉽다는 이유로 쏟아지니 얼개가 멀쩡할 리 없습니다.



 본인 입맛대로 눈과 귀를 닫은 전개는 이내 당연히 억지와 무리수에 잠식당합니다. 공권력의 부재는 대충 이 동네 경찰들은 다 부패했다는 말로 퉁치는데, 이 영화에서 이 정도의 설명은 아주 논리적이고 철두철미한 축에 속하죠. SF라는 장르가 무색하게, 휴대폰이나 CCTV만 잘 만져도 해결될 상황들에 제품 PPL이라도 하듯 과거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당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주인공인 닉을 포함해 스크린 앞에 한 명씩 툭툭 던지는 등장인물들은 서로가 서로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이런 인물들이 빚어내는 작위적인 감정은 누구의 공감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의 딱딱하고 어설픈 관계나 사건에서 발생하는 허점을 또 다른 관계와 사건을 발생시켜 가리려 하는데, 이야기를 이야기로 가리는 것도 아니라 단순히 시선만 순간적으로 돌리는 수준에 불과하죠.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를 포함, 문자로 나열되어 하나씩 맞추어보았을 때야 그럴듯했을 소재와 명대사들은 각본가 출신 감독의 한계를 너무나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하고 싶은 말과 만들고 싶은 장면을 똑같은 호흡으로 죄다 집어넣는 연출은 <웨스트월드>와 같은 TV 시리즈에서나 먹힐 접근이죠. SF 영화의 소재들을 보며 효용이 아쉬운 것을 넘어 딱히 궁금하지도 않게 만든 큰 실패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인질>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