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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Sep 03. 2021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리뷰

마블의 아시아 입국심사 문제은행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Shang-Chi and the Legend of the Ten Rings)

★★★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새로운 얼굴들로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고 있는 마블 스튜디오의 새 얼굴,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입니다. <김씨네 편의점>으로 익숙한 신예 시무 리우를 주인공으로 아콰피나, 양조위, 양자경, 진법랍 등 화려한 면면을 자랑하죠. 그리 많지 않은 전작들 중 무려 세 편을 캡틴 마블 브리 라슨과 함께한 데스틴 다니엘 크레튼이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고대 유물 '텐 링즈'의 힘으로 수 세기 동안 전 세계에 마수를 뻗쳐 온 웬우. 세상에 더 이상 정복하지 못한 것은 없다고 여긴 그는 전설 속에서만 전해내려오는 한 마을을 알게 되고, 그의 행적을 좇던 중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사랑에 빠집니다. 그 결실로 태어난 샹치는 세계를 지배할 가문의 힘을 버리고 평범한 삶을 선택하지만, 한 번 뻗친 아버지의 마수는 더 큰 비밀과 음모를 향해 나아가죠.


 <팔콘과 윈터 솔져>의 팔콘이나 <블랙 위도우>의 옐레나 벨로바 등 어벤져스의 다음 세대를 착실히 준비하고 있는 마블의 완전히 새로운 영웅입니다. <블랙 팬서>로 흑인 문화권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니 이제는 동양 문화권의 지지를 얻을 차례였겠죠. 동시에 타노스와의 전투라는, 세계관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 이후에도 새 이야기를 펼쳐나갈 수 있음을 증명하는 시험대였습니다.



 전반적인 기승전결은 여느 영웅 서사와 다르지 않습니다. 비범한 출신 성분을 숨기고 평범한 삶을 선택했지만, 영웅이라는 운명은 주인공의 그림자에 자석처럼 따라붙습니다. 한두 차례 거부하고 갈등을 빚음에도 결국 그것 또한 자신의 일부임을 깨닫고, 덕분에 종국엔 안과 밖 모두 진정한 내가 되어 어엿한 영웅으로 우뚝 서게 되죠.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단연 동양 문화권의 향기입니다. <블랙 팬서>로 흑인 문화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해 기세가 등등해진 마블은 같은 방식으로 아시아 문화권을 공략하려 하죠. 건축 양식부터 생활 양식, 그리고 전통과 가문을 중시하는 사상 등 선과 악을 막론한 등장인물 모두가 소위 말하는 '동양권' 문화를 공유하며 여타의 마블 영화들과는 꽤나 다른 인상을 풍깁니다.



 액션 역시 무술을 기반으로 한 맨몸 격투가 대다수입니다.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가 절제된 살상용(!) 실전 격투를 선보였다면, <샹치>는 그보다 가볍고 화려한 쪽을 지향하죠. 기본 준비 자세부터 공기와 바람의 흐름을 활용하는 동작 등 동양 무술 하면 떠오르는 모습들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합 맞춘 티가 지나치면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쉽지만, 다행히도 꽤나 공을 들인 듯 하죠.


 무엇보다도 새로 등장한 텐 링의 위용이 엄청납니다. 정확한 기능은 띄워 날리거나 충격파를 만들어내는 정도지만, 그를 눈이 어지럽도록 빠르고 화려하게 활용하며 보는 맛과 타격감을 극대화했죠. 링이라는 물리적 수단과 링에서 발현되는 힘 모두를 어떻게든 하나도 빠짐없이 써먹으려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보입니다. 애초에 이제는 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세계관의 힘이 크기도 하구요.



 문화권을 반영한 소소한 재미도 많습니다. 실내에 들어갈 땐 신발을 벗고 들어가고, 밥상머리에 앉아서는 장래와 진로에 관련된 잔소리가 빠지지 않습니다. 알아듣든 말든 내가 할 줄 아는 언어로 호통을 치고, 전쟁통에도 장유유서는 잊지 않죠. 통째로 묶이는 흑인 문화권과 달리 특정 계통으로 세분화되어 있는 아시아 문화권을 동일시한다는 우려가 노파심이었음을 증명합니다.


 캐스팅되었던 순간부터 기대와 걱정을 함께 안겼던 샹치 역의 시무 리우는 비교적 안정적인 소화력으로 극을 지탱합니다. 진지할 땐 진지하면서도 가벼워야 할 땐 가벼운 매력을 살렸고, 액션에는 묵직함을 실으며 자신을 데려온 케빈 파이기의 안목을 드러내죠. 물론 아직 기존 어벤져스 멤버들과 함께 활동하는 그림은 잘 상상이 가지 않지만, 샹치라는 캐릭터의 실사화는 일단 성공적입니다.



 재료도 말끔하고 접근법도 안정적인 데 반해 정작 그것들로 빚어내는 내용물은 종종 당황스럽습니다. 샹치와 웬우 등 굵직한 인물들의 소개와 배치가 마무리되는 중반부까지는 흥미진진하나, 사실상 와칸다의 하위 호환인 탈로에서 벌어지는 후반부의 사건들은 가뜩이나 지우지 못한 세계관과의 이질감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며 책임지지 못할 설정들까지 꺼내놓기 시작하죠.


 세계관과의 힘겨운 연결점으로 기능하는 모 캐릭터의 등장, 대충 귀여우니까 봐 달라는 모리스의 무리수, 어둠의 드웰러와 위대한 수호자 등 탈로와 관련된 전개 및 설정 대부분엔 억지와 고집이 뒤섞여 있죠. 수천 년을 버텼다는 주장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술한 얼개는 한 번 갈 데까지 가 보자는 듯 호수의 밑바닥까지 꺼내들고, 영화의 장르나 소속까지도 뒤흔드는 노선을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아콰피나의 케이티나 장멍의 수 샤링 등 별 이유나 동기도 없이 꾸역꾸역 비중을 연명하는 캐릭터들은 가뜩이나 불안한 설득력을 갉아먹고, 대사 한두 줄로 대신해도 좋을 과거 회상은 끊임없이 남발되며 러닝타임을 낭비하죠. 샹치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영웅으로 재탄생하는 전개와 무관한, 통으로 덜어내도 좋을 잔가지들이 순전한 연출 욕심으로 달라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미 모든 것을 만회할 치트키를 꺼내든 이후입니다. 바로 양조위의 웬우죠. 특유의 그윽한 눈빛만으로 백 마디 대사를 대신하는 양조위는 말 그대로 극을 지배합니다. 자신의 캐릭터를 악역으로 접근하지 않았다는 그의 인터뷰처럼 자신만의 동기와 수단으로 무장해 선과 악의 경계에서 막대한 존재감을 뿜어냅니다. 샹치의 미래보다 웬우의 과거가 더 궁금하다는 농담엔 일종의 염원이 섞여 있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욘버지(?) 정도를 제외하면 멀쩡한 아버지 찾기가 힘든 이 동네에서 웬우는 천 년의 악행을 묵인할(...) 매력을 보여주었고, 그 매력의 9할 이상은 멜로는 물론 액션마저도 놓치지 않는 양조위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샹치는 주인공이고 웬우는 양조위인 덕에(!) 그 둘이 엮이지 않는 나머지 이야기의 몰입도가 더욱 떨어진다고 볼 수도 있겠구요.



 마블 세계관의 첫 아시아 문화 이야기라는 수식에 취해 하고 싶은 것도 보여주고 싶은 것도 많았습니다. 그것이 정점에 달해 폭발한 결과물이 후반부의 클라이막스 전투씬이겠죠. 그럼에도 기대보다는 우려가 컸던 프로젝트치고 실패보다는 선방한 지점들이 눈에 들어오는 편이고, 다른 캐릭터들과의 합을 궁금해하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성공적인 1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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