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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Oct 01. 2021

<007 노 타임 투 다이> 리뷰

단체사진에서 뽐내는 개인기


<007 노 타임 투 다이>

(No Time to Die)

★★★


 연이은 개봉 연기 사태로 아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었을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가 마침내 정식 개봉을 맞이했습니다. <제인 에어>, <비스트 오브 노 네이션>의 캐리 후쿠나가가 메가폰을 잡고 다니엘 크레이그, 레아 세이두, 라미 말렉, 크리스토프 발츠, 레이프 파인즈, 벤 위쇼, 라샤나 린치, 나오미 해리스, 제프리 라이트 등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스펙터> 사태 이후 연인 마들렌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본드. 하지만 본드는 물론 마들렌의 과거에까지 너무나 깊게 자리잡은 스펙터의 망령은 그들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알고 전 세계를 장악한 권력답게 그를 노리는 또 다른 세력이 등장하며 이제는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은 본드의 작은 소망은 오늘도 한 발 멀어져만 갑니다.


 <블랙 위도우>, <테넷>, <분노의 질주> 등 다양한 작품들이 있었지만, <노 타임 투 다이>만큼 이 시국에게 크게 데인 영화는 없었습니다. 개봉일이 한 번 연기될 때마다 포스터와 예고편을 비롯한 마케팅 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고, 심지어 협찬으로 등장하는 전자제품들을 최신 기종으로 바꾸려 추가 CG 비용까지 들었다고 하죠. 손익분기점은 사실상 달성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치솟았구요.



 그럼에도 더 이상 늦출 수 없었고, 여느 대작들이 그랬듯 스트리밍이라는 대책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007이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클래식함도 어느 정도는 고려한 것처럼 보이죠. 게다가 개봉 전부터 널리 알려졌듯, 2006년부터 무려 15년 동안 제임스 본드 타이틀을 갖고 있었던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007인 터라 양보할 수 없는 이유가 더 많았겠구요.


 그렇게 출발하는 이번 <노 타임 투 다이>는 오프닝부터 엄청난 화력으로 극장행의 진면목을 뽐냅니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처럼 이제는 차로 못하는 것이 없는 영화들도 많아졌지만, 그래도 자동차와 오토바이 그 자체로 펼치는 추격전의 근본을 마음껏 자랑하죠. 한창 관객들을 흥분조로 몰아넣고는 그제서야 나오는 오프닝 타이틀은 이 모든 것이 아직 맛보기에 불과하다는 선언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중심은 본드와 마들렌의 가장 큰 공통 분모인 스펙터가 갖고 있습니다. 언스트 블로펠드의 스펙터 이야기는 제목이 <스펙터>였던 지난 영화에서 끝난 게 아닌가 싶지만, 마블 유니버스의 토니 스타크가 그러했듯 그 유산으로만 수십 개의 각본을 찍어낼 수 있는 수준이죠. 스펙터에게 가공할 미래형 무기가 있었고, 그 무기를 넘어 스펙터 자체를 노리는 악당이 이번 영화의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갑니다.


 관객들에게는 물론 본드에게도 초면인 악당의 등장으로 본드는 자신과 연인의 과거를 찬찬히 따라 올라가고, 영화는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인물들과 새로운 사실들로 새로운 관계를 이끌어냅니다. 이전까지의 007 영화들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로맨스나 가족애 등 '인간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단어들이 영화의 기둥을 하나씩 형성하죠.



 여러모로 요원 007보다는 인간 제임스 본드의 영화입니다. 전편 <스카이폴>이 주디 덴치의 M에게 바치는 헌사였다면, 이번 <노 타임 투 다이>는 그보다 훨씬 강력하고 분명하게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를 정조준하고 있죠. 제임스 본드 역할을 거쳐간 배우들의 머릿수를 떠올려 본다면 일종의 특별 대우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때문에 <노 타임 투 다이>는 007 시리즈에서 꽤나 특이한 위치를 가져갑니다. 보통 오래도록 이어진 시리즈의 분기점 혹은 변곡점이 되는 영화들은 기존 팬들과 새 팬들의 기호 사이에서 갈등하죠. 그러나 이번 영화는 시리즈 팬과 배우 팬 사이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영화의 전후 사정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의 전후를 따지니 일장일단의 정도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구요.



 야심차게 등장하는 얼굴들은 다니엘 크레이그 제임스 본드라는 책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수식어이자 주석이 됩니다. 그나마 레아 세이두의 마들렌쯤이 1인분을 간신히 해낼 뿐, 크리스토프 발츠의 언스트 블로펠드나 레이프 파인즈의 M, 라미 말렉의 룻시퍼 사핀 등 시리즈의 전통적인 바퀴들조차 여기에 흡수된다는 점에서 팬들의 기대가 아주 크게 엇갈리게 되죠.


 게다가 이는 '다니엘 크레이그 제임스 본드'와 '시리즈의 오랜(?) 팬'이라는 두 집단의 교집합만을 노리는 접근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다니엘 크레이그라는 배우에게 특히나 더 큰 애정을 갖고 있지는 않거나, 이 영화 혹은 최근의 몇 편만을 통해 새로 유입된 팬들에게는 어필할 구석이 많지 않다는 것이죠. 단일 액션 영화로서는 부족함이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드의 반대편에 서서 극을 함께 지탱해야 하는 라미 말렉의 룻시퍼 사핀부터가 그렇죠. 까 보니 허점투성이인 계획에 어이가 없는 임기응변, 아무런 이유나 설명도 없이 휘감은 왜색 등,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후반부의 흐물대는 완성도를 떠올려 보면 초중반부 그토록 아껴 둔 이유조차 찾기 어렵습니다. 애초에 이름을 룻시퍼(Lyutsifer)라고 지은 데에서부터 말 못할 이질감을 느낄 수 있구요.


 몇 보 양보해 사핀쯤은 새로운 얼굴이니 그저 '실망스러운 악당' 정도로 아쉬움을 정리할 수 있지만, 블로펠드나 M 등 007의 정체성이나 마찬가지인 캐릭터들까지 단편적으로 소모하거나 기존까지 쌓아 둔 개성을 조금씩 건드리는 통에 시리즈 팬들이라면 더더욱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또 한 명의 본드이기에 함께 보내 주려고 했던 박수까지 거둬들일 이유가 생긴다는 것이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명명백백하게 드러낸 의도 하나만큼은 아주 훌륭하게 살렸습니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다니엘 크레이그에 의한, 다니엘 크레이그를 위한 007 영화입니다. 백발백중의 사격 실력을 뽐내면서도 적들이 쏘는 수백 수천 발의 총알은 죄다 피하고, 폭탄에 충돌에 추락 등 남들은 윤회를 몇 바퀴씩 겪어도 될 위기에도 멀쩡히 뛰어다니지만 팬들은 개의치 않죠.



 영화의 완성도나 설득력도 구성에서 빠지지 않지만, 관객의 개인적인 애정에 꽤 많은 것이 달려 있는 영화입니다.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이 달려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장장 2시간 4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나 초거대 규모의 제작비, 007이라는 오랜 전통의 시리즈에 적용하기에는 상당히 모험적인 도전이었죠. 득보다는 실이 많지만, 그 상대적으로 작은 득의 깊이는 또 따져 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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