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킴지 Oct 19. 2021

<스틸워터> 리뷰

신념 앞에 들이댄 거울


<스틸워터>

(Stillwater)

★★★☆

 

 <스포트라이트>의 톰 맥카시 감독과 맷 데이먼, 애비게일 브레슬린, 카밀 코탄 등이 뭉친 <스틸워터>입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지난 8월 말부터 9월에 걸쳐 개봉을 완료했지만, 국내엔 아무래도 굵직한 경쟁작들과 명절 탓에 10월까지 밀려나고 말았죠. 영화의 제목인 '스틸워터'는 미국 북부 오클라호마에 위치한 도시의 이름이구요.



 프랑스 유학 중 친구를 살해한 혐의로 감옥에 갇힌 딸 앨리슨,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 빌. 언어도 문화도 어색한 타지에서 앨리슨은 진범의 존재를 주장하지만, 증거도 없는 외침을 진지하게 들어줄 사람은 빌뿐이죠. 이에 빌은 딸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익숙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프랑스로 향하고, 맨땅에 헤딩으로 들이받은 곳에서 진실에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합니다.


 얼핏 <스틸워터>는 자식의 무고함을 입증하려 세상의 불의와 맞서 싸우는 아버지의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일부는 아주 틀린 이야기도 아닙니다. 미국인이라면 치를 떠는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앨리슨은 딱히 환영받지 못했고, 연이어 밝혀지는 사실들은 앨리슨의 주장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무시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뒷받침하죠.



 나아가 앨리슨의 주장과 어투는 제 3자인 관객들의 눈과 귀에도 큰 설득력을 갖춘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평범한 10대답게 충동적인데다가 고집스럽고,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크게 감정적으로 대응하죠.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음에도 그저 기분이 나쁘고 실망했다는 이유만으로 등을 돌리기 일쑤입니다. 빌은 아버지라는 이유로 그를 모두 받아주어야 하구요.


 그런데 영화는 이 빌마저도 딱히 완전한 정의로 묘사할 마음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가정은 파탄났고, 건설 현장에서 일하며 거칠대로 거칠지만 신념 하나만큼은 강합니다. 여기서의 신념이란 공공의 선처럼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자라면서 갖게 된 크고 작은 믿음들이죠. 거기에 반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을 줏대로 세상을 살아 왔으니 본인이 옳다고 믿습니다.



 여기에 조연으로 버지니를 더합니다. 프랑스 마르세유라는 공동체에서 자유를 앞세워 사회 운동에도 앞장서 온 싱글맘이죠. 언제나 초강대국의 자랑스러운 국민이었던 빌은 그녀와 마르세유 앞에서 전형적으로 멍청한 미국인에 불과합니다. 트럼프 지지자인 것이 뻔해 누구에게 투표했냐는 물음에 빌은 전과가 있어서 투표를 하지 못했다고 답하는 광경까지 나오죠.


 이처럼 <스틸워터>는 딸을 구하려는 아버지의 드라마에 의외로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색채를 여러 번 입혔습니다. 빌과 앨리슨, 버지니와 마야는 물론 잠깐씩만 등장하는 조연들까지도 각자를 수식할 만한 사회적 키워드 하나씩은 가지고 있죠. 그렇게 특정한 계층이나 무리를 대표하는, 혹은 최소한 감독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 인물들의 상호작용과 빌의 궤도는 '지금의 미국'이라는 단어로 나아갑니다.


 예전의 관객들이었다면 그저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이 현실이라며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겠지만, 지금의 관객들은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스스로의 주관을 갖추고 있습니다. 때문에 특정한 계층을 대표하는 캐릭터를 만들어낼 땐 전보다 몇 배의 신중함을 기울여야 하죠. 그런 면에서 <스틸워터>는 각자가 갖고 있는 편견 내지는 지식에서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경계선을 찾아냈습니다.



 앨리슨의 무죄를 두고 벌어지는 이야기도 흥미롭기는 하지만, 주객전도라고도 볼 수 있는 이 광경 또한 <스틸워터>의 분명한 매력입니다. 의자에 앉아서 스틸워터의 풍광을 바라보는 빌의 마지막 대사 또한 지금의 미국을 바라보는 감독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겠구요. 모범적이고 영웅적인 미국인 자리에 톰 행크스가 앉아 있다면, 맷 데이먼은 악이 아님에도 그 대척점이 되는 미국인을 훌륭하게 연기해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007 노 타임 투 다이>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