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하고 얼근하게
<더 헌트>와 <쿠르스크>의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 신작, <어나더 라운드>입니다. 사실 본토인 덴마크에선 2020년 9월 개봉된 작품이라 신작이라고 하기엔 뭐한 감이 있지만, 국내엔 지난 1월 중순 정식 개봉되었죠. 무려 지난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한 작품이고, 이렇게 늦은 개봉에도 입소문의 힘을 쏠쏠히 보며 관객수 2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고등학교 교사 니콜라이, 마르틴, 페테르, 톰뮈는 의욕 없는 학생들을 상대하며 매일이 우울하기만 합니다. 그러던 중 니콜라이의 40번째 생일 축하 자리에서 '인간에게 결핍된 혈중 알콜 농도 0.05%를 유지하면 적당히 창의적이고 활발해진다'는 이야기가 튀어나오고, 그렇게 지루함으로 가득찼던 아저씨들의 일상을 변화시킬 그들만의 실험이 시작됩니다.
정말 소소한 영화입니다. 별 게 아닌 것처럼 보였던 작은 변화가 구르고 굴러 일상을 변화시키고, 신나서 더 나아가다가 맞닥뜨린 결과에서 또 자신만의 교훈을 얻는 영화죠. 비슷한 출발점에서 로맨틱 코미디로 나간 것이 <예스 맨>, 상업적으로 엑셀 끝까지 밟은 것이 <리미트리스>쯤 되겠습니다. <어나더 라운드>는 일상이라는 선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구요.
때문에 영화 내적으로는 할 말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적당히 취하면 무엇이든 잘 풀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동한 아저씨들이 밑져야 본전이라며 실행에 옮기고, 지금까지 이렇게 하지 않은 것이 후회될 정도로 잘 풀려나가는 모습에 또 얼근히 취하죠. 하지만 한 번 달리기로 마음먹은 열차는 한두 번의 브레이크로는, 어디 통째로 부딪칠 때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예시로 든 <예스 맨>의 무한 긍정이나 <리미트리스>의 알약처럼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소재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방식으로 전개된다면 모를까, <어나더 라운드>의 술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긴 합니다. 모두의 일상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연관되어 있고, 극중 주인공들의 상황과 처지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기도 쉽죠. '적당히'만큼 어려운 말이 또 있나 싶은 기억들은 하나씩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적당한 혈중 알콜 농도의 도움을 받은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평소 완전한 맨정신이라면 하지 못했을 일을 가능케 합니다. 더욱 빠르게, 더욱 많이 해내거나 심지어는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일도 가능케 합니다. 털어놓을 기회가 없어 언급한 적은 없지만, 사실 여기 올라온 글들 중에도 가끔은 한두 잔의 힘을 빌어 손 끝에서 쏟아지듯 써내려간 리뷰도 있습니다(그런 글들은 퇴고가 필수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번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변화가 술 덕분에 잘 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또 다르게 따져 보면 술이 만들어 준, 좀 더 적극적이고 친근한 태도 덕분이라고 보아야 맞을 수도 있습니다. 평소 가졌던 말투만 바꾸었더라도 언제든 바꿀 수 있었을지도, 이 긍정적인 변화를 내가 아닌 술이 만들었다는 생각이 가장 위험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술은 곧 인생이라는 취기 어린 말엔 많은 사람들의 많은 기억이 들어가 있습니다. 웃다가 울다가, 다시 못할 것처럼 놀다가 다시 안할 것처럼 후회하기도 합니다. 기억이란 해낸 것들의 파편입니다. 과거의 내가 해낸 것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도, 그래서 오늘도 술잔을 치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마냥 즐겁거나 마냥 소소하지만 않은 것이 <어나더 라운드>의 향기입니다. 아저씨들이 노는 모습을 마냥 바라볼 때 풍기는 향기와 그것이 지나간 뒤 보여주는 잔향은 각기 다른 흔적을 남깁니다. 일탈로 규정했다면 경험으로 포장할 수 있겠으나 탈선으로 규정한다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극중 각 인물마다,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마다 서로 다른 척도로 서로 다른 메시지를 얻어갑니다.
똑같은 술도 천차만별의 결과를 부릅니다. 누구에게는 쓴 술이 누구에게는 달기만 하다는(...) 농담도 마냥 농담이 아니긴 합니다. <어나더 라운드>는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원제인 덴마크어 'druk'은 단순히 '폭음'이라는 뜻이지만, 영제 'another round'가 '한 잔 더'와 '다음 차례'라는 중의적 제목인 데엔 이유가 있으리라는 작은 망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