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빠진 서론
작년에 개봉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은 일본 역대 박스오피스 1위, 국내 관객수 215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우며 소년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뜨거워진 무대의 다음 주자에겐 자연히 커다란 관심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고, 그에 용감하게 출사표를 던진 <극장판 주술회전 0> 또한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에 본토 개봉되어 흥행 수익 100억 엔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어릴 적 소꿉친구인 오리모토 리카를 교통사고로 눈앞에서 잃은 옷코츠 유타. 어른이 되면 결혼하자던 약속은 저주가 되어 그의 곁을 떠돌고, 고통스러워하던 유타는 주술사 고죠 사토루의 눈에 들어 주술고등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너무나 오랜만에 친구라는 것을 갖게 된 유타는 조금씩 성장하지만, 인간들을 주술사의 노예로 부리려는 게토 스구루의 등장은 그의 모든 것을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대강 <주술회전>이라는 애니메이션이 <귀멸의 칼날>을 잇는 인기 시리즈라는 것만 알고 감상한 작품입니다. <무한열차편> 관람 당시 극장판이라는 단어만 믿고 보았다가 1기 마지막화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내용이라는 사실에 좌절했더랬죠. 조금이라도 설명해 주겠거니 하고 주인공 일행의 관계도는커녕 귀살대, 주(하시라) 등 아무 것도 모르고 보기엔 조금 어려운 영화였습니다.
다행히 이번 <주술회전 0>는 프리퀄입니다. 애니메이션 시리즈와는 주인공부터 다르기에 찾아보고 싶어도 뭘 얼마나 찾아봐야 할지조차 감을 잡기 어렵죠. 프리퀄이 원래 그러하듯 기존 팬들에게는 못내 궁금했던 이야기를 들을, 새로운 팬들에겐 세계관에 입문할 기회인 셈입니다. 당연히 미리 알고 보면 100% 즐길 수야 있겠으나, 낮은 진입 장벽도 분명한 장점 중 하나죠.
그렇게 이번 극장판은 소년만화의 모범적인 전개를 따라갑니다. 남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 혹은 잠재력을 지닌 주인공이 작품 세계관에 입성해 성장합니다. 전에는 갖지 못했던 것들을 가지며 꿈꾸지 못했던 것들을 꿈꾸게 되고, 그를 위협하는 존재의 등장으로 갖고 있던 힘 혹은 잠재력을 폭발시키죠. 최근엔 주인공의 잠재력이나 시작점의 차이로 시대나 유행을 따지기도 합니다.
0에서 출발한 주인공이 차츰차츰 성장해 최종 보스를 상대하는 것이 예전의 정석이었다면, 처음부터 지니고 있는 엄청난 힘을 때와 장소에 따라 조금씩 개방하는 것이 최근의 유행이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세계관의 모든 악당들이 주인공의 펀치 한 방이면 무조건 죽는(...) 만화도 나왔는데, 이번 <주술회전 0>는 그를 반반 정도 섞어 진지하면서도 트렌드를 반영한 결과물을 내놓았습니다.
2시간도 되지 않는 러닝타임 동안 완전히 새로운 주인공을 소개하는 동시에 극장판만이 선보일 수 있는 볼거리를 제공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막대한 힘을 타고났으나 제어에 서투르다고 해야 주인공의 자의든 타의든 주기적인 눈요기를 꺼내들 수 있겠죠. 무엇 하나 제대로 배운 적 없는 초짜가 세계관에서 손꼽는 최강자와 맞선다는 억지에 들이밀 수 있는 최선의 핑계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주술회전 0>의 장점이자 태생적 한계입니다. 기술은커녕 주술의 개념조차 배운 적 없는 주인공이 세계관에 딱 네 명밖에 없다는 '특급' 중 한 명으로 분류되고, 작중 1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모든 등장인물들을 죽음의 문턱까지 잡아끈 악당과 대등하게 맞서죠. 극장판만이 선사할 수 있는 희열과 세계관의 설득력 중 한 쪽을 가지려면 다른 한 쪽은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설명은 친절하지만 전개는 불친절합니다. 주조연들의 입을 빌려 개념과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장면은 들어가지만, 우정과 목숨을 맞바꾸겠다는 선언에 공감할 시간은 주지 않죠. 괴물과 본격적으로 맞서는 첫 장면에서부터 마치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방불케 하는 명대사와 연설이 범람하는데, 관객과는 물론 서로도 초면인 상황에서 쏟아지는 감정선에 장단을 맞추기는 영 쉽지 않습니다.
기승전결이 아니라 전결과 전결만이 반복됩니다. 인물 관계부터 전투 양상에 이르기까지 과정은 생략된 채 결과만 나열됩니다. 볼거리 위주의 구성을 택하느라 그랬다고는 이해하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거나 아예 그래서는 안 되는 곳도 똑같이 접근합니다. 기존의 팬이라면 그를 이미 알고 있거나 짐작할 수 있겠으나, 그런 이유라면 애써 낮춘 진입 장벽과 또 다시 불협화음을 냅니다.
악당인 스구루 또한 절대악과 소위 말하는 '사연 있는 악당'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데, 그저 친구와 살아갈 이유가 필요하다는 유타의 절규와 맞물리면 조화가 썩 좋지는 않습니다.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라, 유타를 사토루보다 한 발 늦게 발견했다는 불운으로 적대 관계가 되었다고 받아들이기 쉽죠. 유타를 처음 만난 것이 스구루였다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으리라는 생각 자체가 둘 다의 개성엔 해가 됩니다.
그래도 애니메이션 극장판 하면 전투씬을 빼놓을 수 없겠죠. 리카의 무지막지한 무력을 바탕으로 한 유타의 액션 쪽은 볼 게 많지 않습니다만, 고죠 사토루를 비롯해 일부러 아껴 두었다가 하나씩 푸는 주조연들의 화려한 활약은 후반부의 확실한 동력입니다. 15세 관람가의 한계까지 접근한 기괴함과 유혈로 그 힘을 더하구요. 이것만으로 극장판의 존재와 극장 관람의 의의를 챙길 팬들도 수두룩하긴 할 겁니다.
분명 뼈대 자체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도 볼 수 있겠다고 기대할 만하지만, 그 위에 붙인 살들은 대부분 이미 환호할 준비가 되어 있는 팬들을 위하고 있습니다. 대미를 장식하는 특정 대사에선 영화 내에서의 여운보다도 여기저기서 환희에 몸을 비트는 객석 반응 덕에 중요도를 짐작할 수 있기도(?) 했구요. 모르고 보기엔 걸리는 게 많으나 애초에 그런 눈을 딱히 고려하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