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냥 물 흐르듯
2017년 5500만 달러를 들인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3억 5천만 달러의 흥행에 성공하면서 문제없이 도달한 속편, <나일 강의 죽음>입니다. 제작비는 9천만 달러로 뛰었고, 케네스 브래너가 다시 감독과 주연을 맡았죠. 에피소드형 영화답게 출연진은 대부분 물갈이되어 이번엔 톰 베이트먼, 갈 가돗, 아미 해머, 엠마 매키, 아네트 베닝, 러셀 브랜드, 레티티아 라이트, 로즈 레슬리 등과 함께했습니다.
골치아픈 사건들에서 손 떼고 마음 편하게 휴양지로 떠난 에르큘 포와로. 그러나 전 세계 모든 명탐정들이 그러하듯, 그가 가는 곳마다 그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사건은 끊이지 않습니다. 행복한 신혼부부를 태운 나일 강의 초호화 여객선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단 한 명도 용의선상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긴장 가득한 상황에서 포와로의 엄청난 추리력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하죠.
분명 전편 마지막에 기차에서 내린 포와로에게 경찰이 다가와 나일 강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째 거기서부터 이어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집트에 가는 것이야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다고 해도 나일 강으로 향하는 과정은 꽤나 즉흥적이죠. 어쩌면 속편을 볼모로 삼은(...), 정말 급했던 1편만이 할 수 있는 외침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지난 영화와 대부분의 에르큘 포와로 시리즈가 그러하듯, 이번 <나일 강의 죽음>도 판을 소개하는 데만도 꽤 공을 들입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워낙 많은 통에 각자가 어떤 이유로 지금 여기까지 당도했는지 아주 찬찬히 설명하죠. 직업부터 출신까지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이라 한두 번 나오는 것으로는 관계도를 쉽게 그리기 어려운데, 그런 면에서는 꽤나 친절합니다.
추리물의 연출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관객이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교묘한 동시에 질리지 않을 정도로 설득력을 갖춰야 합니다. 소설 쪽은 그나마 텍스트를 통해 작가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양의 정보만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영화나 드라마 쪽이라면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보여주는 걸 곧이곧대로 볼지도 계산해야 하고, 그 오차 범위를 고려한 또 한 꺼풀의 난이도 조절이 필요하죠.
다시 말해 넓은 의미의 추리물들은 스스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단서를 제공해야 하지만, 영상화된 추리물들은 단서를 주면서 그것이 단서라는 단서도 주어야 합니다. 제아무리 아무 생각도 없이 흘리는 것처럼 보인다 한들 최소한 관객들이 그를 기억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죠. 여기에 실패하면 단서조차 보여주지 않고 제멋대로 결론을 향해 달려가며 기본도 갖추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기 십상입니다.
가장 흔한 방식으로는 단서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나오는 순간 그에 뒤따르는 인물들의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 있겠습니다. 겉보기엔 별게 아닌 듯한 말을 들려주거나 대상을 보여주는 순간, 남몰래 포와로의 미묘한 표정을 보여주는 식이죠. 한 발 더 나아가자면 혼자 남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포와로를 보여줄 수도 있겠구요.
이렇게 대놓고 단서를 던져대면서도 관객들이 맞추지 못하게 해야 한다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나 한 번 써먹은 트릭은 다시 써먹기 어려운 장르물에서, 그것도 수십 년 전 만들어진 고전을 2022년의 관객들에게 선보여야 하니 더더욱 그렇겠지요.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다른 탐정물들은 빛을 보지 못하는 와중 에르큘 포와로 시리즈만이 영화화될 수 있었던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영화는 힌트를 줄지 몰라도 에르큘 포와로는 힌트를 주지 않습니다. 단서가 단서로 이어져 사건을 실타래처럼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지럽게 흩어진 단서들을 머릿속에서 조합하고 또 조합해 자신만의 답이자 정답을 내놓습니다. 모든 사람과 모든 상황을 의심하기에 잘못 짚을 일도 없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순간 약에 취해 자고 있었더라도, 처음부터 함께한 절친이라도 용의선상에서 절대 배제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앞서 언급한 영화의 친절함은 꼭 영화가 원해서 친절한 것만은 아닙니다. 여타 추리물이라면 들어가 있을 중후반부의 단계가 관객들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포와로의 숙고로 대체되기에 그것 말고는 보여줄 게 없기도 하죠. 종국엔 언제나처럼 사람들 모아놓고 정답을 주루룩 쏟아내고 툭 끝내는 식이라 기승전결의 비율에서 기와 승이 7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처럼 사건만 다르지 이를 펼쳐내고 풀어내는 과정은 거의 동일하기에 전편 <오리엔트 특급 살인>과 장단점을 공유합니다. 놀랍게도 낭비되는 인물은 하나도 없는 가운데, 인상 팍 쓰면 영혼까지 꿰뚫어보는 듯한 통찰력과 인간적인 귀여움이 교차하는 에르큘 포와로의 매력도 여전하죠. 그래도 이번엔 포와로의 과거도 조금 풀어주면서 수많은 인물들 사이 사라지기 쉬운 중심을 유지하려 애쓰기도 합니다.
물론 이 역시 사건을 해결하기 직전까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탐문만을 이어가는 포와로의 스타일 탓이기도 합니다. 차례대로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조연들 사이에서 그를 듣는 주인공의 존재감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죠. 이렇듯 이번 <나일 강의 죽음> 또한 장점은 단점과 이어지고 단점은 장점과 이어지며 어느 한 곳을 손대기 어려운 구성인데, 이는 호와 불호의 이유가 같은 결과를 낳습니다.
게다가 정말 결정적인 증거가 없거나 이렇게까지 단언할 수 없는 자잘한 상황마저도 맨 마지막 완전한 정답에 조금씩 섞어 보여주고, 범인의 한숨 섞인 자백으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현장에서야 연출된 분위기에 휩쓸려 털어놓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제 3자인 관객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음에도 '포와로는 알고 있다'는 말에 뭉개 단 한 방에 끝내는 터라 찝찝한 뒷맛을 남기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포와로만을 위해 존재하는 무대라고 느끼기 쉽습니다. 특히나 포와로씩이나 되는 탐정을 고민하게 만드는 살인자를 대척점에 세워두었음에도 사건의 어느 단계에서도, 심지어 정체가 밝혀진 뒤에도 범인에겐 다른 용의자들과 구별될 만한 존재감이 부여되지 않죠. 하다못해 그렇게 잔혹하고 대담한 심성으로 그냥 포와로만 없애 버리면 간단한 일에 사서 고생한다는 감상까지도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원작의 뼈대는 유지한 채 케네스 브래너의 에르큘 포와로 시리즈 후속편으로는 일관된 완성도를 갖추었습니다. 전편을 흥미롭게 보았다면 이번 영화 역시 드라마의 다음 에피소드를 보듯 매끄럽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폭스가 팔려나가며 한솥밥 먹던 시리즈들 모두 속편의 가능성이 연막 속으로 사라졌지만, 2편을 보고서도 이 사실이 안타깝다는 것은 생겨난 팬심의 반증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