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킴지 Mar 30. 2022

<리코리쉬 피자> 리뷰

어쨌든 지금의 나


<리코리쉬 피자>

(Licorice Pizza)

★★★☆


 영화 좀 보는 티를 내고 싶으면 꼭 약자로 줄여 불러야 하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리코리쉬 피자>입니다. 2018년 <팬텀 스레드> 이후 간만에 돌아왔죠. 알라나 하임과 쿠퍼 호프만을 주인공으로 숀 펜, 톰 웨이츠, 브래들리 쿠퍼, 베니 사프디, 마야 루돌프 등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얼핏 화려해 보이지만, 익숙한 이름들은 대부분 우정출연 정도인지라 스포트라이트는 우리 신예들에게 맞춰져 있죠.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고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것 같은, 사랑에 빠진 소년 개리와 불안한 20대를 지나고 있는 알라나. 운명처럼 시작된 둘의 인연은 좀처럼 마주치는 손뼉의 소리가 나질 않습니다. 삐걱대며 이 사람 저 사람을 거치며 시간만 속절없이 흐르고, 처음의 설렘은 어느새 사라져 버린 와중에도 그 가장 아래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아직 남아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꾸며 입은 옷들의 핏만 보아도 짐작이 가는 그 때 그 시절 청춘들의 이야기입니다.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땐 그것보다 거대해 보이는 것이 없는 바로 그 시절이죠. 시작된 것은 끝날 리가 없어 보이고, 자신이 나아가는 길이 세상 누구도 밟을 용기조차 내 보지 못한 대담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를 결과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시간뿐이지만, 그것조차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믿는 시기겠지요.



 정말 잠잠하고 담백합니다. 어른들의 세상에 10대의 껍데기만 씌워 놓고, 다들 모든 것에 너무나 익숙해졌다고 착각한 나머지 현실은 더하다고 주장하며 자극적인 것으로 범벅을 해 놓고는 청춘물이라고 우기는 창작물도 많죠. 그의 정반대엔 몽글몽글한 설렘으로 무대와 교정을 가득 채운 청춘 로맨스가 있겠구요. 그러나 <리코리쉬 피자>는 둘 다가 되어도 무관함에도 어느 쪽도 택하지 않습니다.


 특유의 스타일과 호흡으로 뚜렷한 팬층을 확보한 폴 토마스 앤더슨의 작품들 중 가장 대중적임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대중적이란 상업적 재미를 갖추었다기보다는 그만큼 진입 장벽이 낮다는 뜻으로 보아야 맞습니다. 대부분의 전작들은 이번에도 이전까지 해 왔던 것들을 다른 줄거리에 잘 녹여냈길 기대하며 보아야 했지만, 이번엔 아무런 부담이나 준비 없이 맞닥뜨려도 매끄럽게 볼 수 있죠.



 포스터만으로는 누가 보아도 알라나가 주인공인 것처럼 보입니다(처음 보고는 시얼샤 로넌인 줄 알았습니다만). 실제로 영화의 전개도 개리보다는 알라나의 상대들을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편이죠. 그러나 영화의 초점을 따지자면 정확히는 알라나와 개리의 관계를 향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우정 중 어떤 것으로 정의해도 다른 한 쪽이 아쉬울 바로 그런 관계죠.


 로맨스 영화에서는 꽤 흔한 소재지만, <리코리쉬 피자>엔 로맨스 영화보다는 청춘물이나 일상물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립니다. 보통의 영화들은 특정한 감정의 존재나 발현을 전제하고 상황을 만들어갑니다. 둘은 서로를 좋아하고 있기에, 혹은 둘은 앞으로 서로를 좋아할 것이기에 펼쳐지는 다사다난하고 파란만장한 사건들의 연속을 다루게 되죠.



 그러나 <리코리쉬 피자>는 순서를 바꾸었습니다. 시작과 동시에 개리는 알라나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만, 알라나는 물론 관객들 또한 이것이 딱히 진짜 사랑이라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잘 쳐줘봤자 첫눈에 반해서는 평생의 사랑을 만났다고 착각하는 15살짜리의 풋풋함쯤으로 생각하죠. 하지만 사랑이 아니라고 해서 아무 것도 아닌 건 아닙니다. 무언가의 시작점이고, 영화는 그 시작점의 향방을 그립니다.


 감정으로 상황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으로 감정을 구성합니다. 아직 어리디 어린 개리 쪽이야 당분간은 뭘 하든 말든 별 상관이 없겠지만, 20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는 알라나의 입장에서는 계속 이렇게 하다간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반환점을 지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런 꼬맹이들이 치기로 벌이는 일들에 끌려다니는 상황 자체를 새삼스러워지는 좌절의 순간도 왕왕 찾아옵니다.



 그래서 개리가 아닌 다른 곳에도 관심을 놓지 않습니다. 잘 나가는 영화배우, 동네 가장 부잣집에 사는 영화 제작자, 도시를 바꾸겠다고 선언한 젊은 정치인 등 문득 열리는 문에도 발은 꼭 한 번씩 넣어 보죠. 그러나 누구도 자신에게 개리가 옆에 있을 때만큼의 편안함을 주지는 못합니다. 편안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편합니다. 때로는 너무나도 영악해 이것이 사회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개리가 알라나에게 주어진 평생의 짝이어서는 아닙니다. 개리라는 남자가 아니면 살 수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개리의 옆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지금껏 자신이 보아 왔던 자신의 모습들 중 가장 마음에 들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를 닮아서, 내가 자기를 발전시켜줘서 좋다는 사람의 곁에서 목적도 없이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도구처럼 사느니 내가 선택하고 나를 선택한 사람의 곁을 그리워하는 것이죠.



 일반적인 몽글몽글함의 정의에서는 다소 벗어나 있지만, 최소한 감독 필모그래피 중에서는 앞으로도 이것보다 몽글몽글한 영화가 나오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매튜 브로데릭을 닮은(?) 주인공 쿠퍼 호프만은 생전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과 자주 협업했던 필립 시모어 호프만의 아들인데, 이번 영화가 세대를 뛰어넘은 인연의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작가의 이전글 <시라노>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