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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Mar 30. 2022

<시라노> 리뷰

사랑이란 그 말은 못해도


<시라노>

(Cyrano)

★★★☆


 최근 <다키스트 아워>와 <우먼 인 윈도>를 내놓았던 조 라이트가 주특기로 돌아왔습니다. <오만과 편견>, <안나 카레니나>, <어톤먼트>의 영광을 재현할 <시라노>죠. 피터 딘클리지를 주인공으로 헤일리 베넷, 켈빈 해리슨 주니어, 벤 멘델손 등이 이름을 올렸고,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아쉽게도 의상상 딱 한 부문에만 후보로 올라가며 씁쓸함을 삼켜야 했습니다.



 10명의 남자와 싸울 용기는 있지만 평생을 사랑해 온 한 여자에게 고백한 용기는 없는 작은 시인, 시라노 드 베르주락. 아이들은 사랑이 필요하고 어른들은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시대에 진실된 사랑을 찾는 여인, 록산. 그런 그녀 앞에 눈부신 남자 크리스티앙이 나타나고, 록산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표현할 줄 모르는 그는 시라노가 대신 써 준 편지로 그녀에게 마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무려 1897년에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에드몽 로스탕의 동명 희곡이 세기를 두 번이나 넘어 스크린에 부활했습니다. 할리우드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피터 딘클리지를 주연으로, 주인공 시라노의 코가 눈에 띄게 크다는 설정이 시라노가 소인이라는 설정으로 바뀌었죠. 그 외엔 대부분 원작을 충실하게 따랐고, 덕분에 수도 없이 많은 기반 창작물에서 자신들만의 색을 확보하며 출발합니다.



 고전 특유의 위대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가슴 속에 품은 뜨거운 사랑이 가능하게 하는 모든 것들이 소재가 되죠. 갖게 되는 사람이 결코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운명적이고, 과거의 자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들을 기꺼이 하게 만든다는 데에서 또 극적입니다. 사랑 앞에서라면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도 예전만큼의 힘을 뽐내지 못합니다.


 거기에 뮤지컬입니다. 홀로 곱씹는 내면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접근법이죠. 누군가의 가장 내밀한 속내는 절친쯤 되는 타인을 통해서도 쉽게 꺼내들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내레이션을 집어넣으면 각본을 강제로 해당 인물의 1인칭 시점에서 진행할 수밖에 없죠. 혼자 중얼대는 독백은 설득력을 무너뜨리기가 너무 쉽구요. 반면 뮤지컬은 모든 사람의 목소리로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시라노는 남몰래 록산을 사랑해 왔습니다. 호방하고 활달한 성격이라 자신의 고집을 위해서는 밥값을 연극 표에 써 버리는 것도 주저하지 않지만, 사랑 앞에만 서면 떨리는 몸과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죠. 록산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자신처럼 보잘것없는 사람과 어울릴 수 없다고, 세상이 손가락질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아끼는 마음만큼은 감추지 못해 그녀의 곁을 맴돌죠.


 록산에게 시라노는 누구보다 든든한 친구입니다. 오랜 세월 함께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신뢰를 쌓았습니다. 어떤 고민이든 털어놓을 수 있고, 어떤 기쁨이든 나눌 수 있는 사이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옆에 묶여 새장 밖으로 나설 날만 꿈꾸던 중, 길을 걷다 우연히 바라본 사람에게서 운명적 사랑을 느끼죠.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 환희를 남몰래 말할 사람은 단 한 명, 시라노뿐입니다.


 시라노는 서로에게 빠져드는 록산과 크리스티앙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크리스티앙의 부탁으로 뜨거운 사랑이 담긴 편지를 대신 써내려갑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지만, 그의 출발도 도착도 그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록산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라도 자신의 마음을 록산이 읽을 수만 있다면 멈출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개인적이지만 너무나도 보편적입니다. 비껴간 사랑의 화살표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1000년이 지날 이후에도 유효한 아픔입니다. 그녀의 사랑은 바랄 수 없어도 그녀의 행복은 바랄 수 있기에 자신을 내어줍니다. 나의 곁에서 웃을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지면서도 다른 곳에서 우는 것은 더욱 견딜 수 없습니다.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너무나도 뻔하지만, 오늘도 앞으로 향합니다.


 시공간을 뛰어넘으면서도 그 시대만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을 가벼이 보지 않습니다. 사랑의 위대함을 표현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사랑의 위대함 그 자체에 온 신경을 집중합니다. 신파와 치정 등 쓸데없는 곳에 시선과 시간을 허비하며 자신의 순수함을 흐리지 않습니다. 보여주기로 한 것만을, 나아가기로 한 곳만을 오롯이 바라봅니다. 너무나 올곧고 순수해서 오히려 신선합니다.



 균형을 유지하는 데에 온 힘을 쏟은 영화입니다. 인물과 사건, 선과 악, 대사와 노래, 말과 행동 사이에서 한 쪽으로 쏠리거나 한 쪽을 해치는 가능성을 최대한 배제합니다. 지루할지언정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조 라이트를 있게 한 15년 전의 손길은 건재했고, 거기에 더해진 피터 딘클리지의 존재는 시라노 드 베르주락이라는 나무에서 새롭고 단단한 가지를 뻗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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