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다는 눈속임의 역사
얼핏 대단해 보이는 신작 작업에 들어갔다가 몇 달 지나면 엎어졌다는 소식으로 돌아오곤 하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나이트메어 앨리>입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 이후 4년만의 복귀죠. 브래들리 쿠퍼, 루니 마라, 토니 콜렛, 윌렘 대포, 리차드 젠킨스, 론 펄먼, 케이트 블란쳇 등 아주 화려한 이름들이 함께했습니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구요.
성공에 목마르고 욕망으로 가득한 청년 스탠은 정처없이 떠돌던 중 들어가게 된 유랑극단에서 사람을 읽고 속이는 기술을 터득합니다. 단원들의 환심을 산 스탠은 그들의 가장 어두운 곳까지 파헤쳐 들어가고,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상류층으로 향하죠. 채워지지 않는 그의 위험한 욕망을 꿰뚫어 본 심리학자 릴리스 박사는 뉴욕에서 가장 위험한 거물을 그에게 소개합니다.
살아있는 닭의 목을 깨물어 먹는 초반부 장면에서부터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특유의 디테일한 잔혹함이 묻어납니다. 대강 보여주지 않거나 그렇게까지 자세히 묘사할 필요는 없는 유혈에도 아주 세심한 시선을 기울입니다. 그 때문인지 해외에서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았지만, 국내에서는 어떻게인지 15세 관람가 등급을 받아냈네요. 상영시간이 동일한 것을 보니 편집이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행히도(?) <나이트메어 앨리>는 델 토로의 여느 영화들처럼 잔혹함이 주가 되는 영화는 아닙니다. 주인공 스탠은 관객들에게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과거가 있는 인물입니다. 허우대도 멀쩡하고 머리도 비상한데, 푼돈을 받고 유랑극단에서 허드렛일을 자처합니다. 그러나 딱 봐도 무언가 꿍꿍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스탠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습니다.
유랑극단은 밑바닥 중의 밑바닥입니다. 조금의 돈만 될 것 같으면 인간성 정도는 얼마든지 버려지는 곳입니다. 사람을 속이는 데엔 프로들인지라 거짓을 말하는 데에도 일말의 가책이란 찾을 수 없고, 더 많은 돈과 더 긴 생명력을 위해 그 수위를 조금씩 올려가는 곳이죠. 귀신이 보이는 것처럼 연기를 하는 사람부터 갈 곳 없는 부랑자들을 납치하고 중독시켜 구경거리로 팔아먹는 사람까지 정도도 다양합니다.
그럼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습니다. 다들 기구한 사연 하나쯤은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습니다. 거기서 그렇게 빌어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쏠리는 순간의 시선조차 과분하다고들 여깁니다. 스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진심으로 따뜻하게 대하건 센 척이나 하며 차갑게 대하건 딱히 알 바가 아닙니다. 이 곳은 자신이 영원히 있을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이트메어 앨리>는 욕망을 이야기합니다. 유랑극단을 거쳐 상류 사회로 나아간 스탠은 자신의 성공을 내심 자랑스러워합니다. 사람을 읽고 상황을 판단하는 자신의 특수하고도 뛰어난 능력이 지금을 만들었다고 여깁니다. 옳다고 생각해서 나아간 길이 탄탄대로였으니 앞으로도 그럴 이유는 충분합니다. 세상에 나처럼 순수한 욕망으로 전진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큰 물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이미 세상에 자리잡고 있던 거대한 욕망들에 비하면 밑바닥에서 갓 올라온 스탠의 욕망은 작고 보잘것없는, 그저 조금 큰 자기애에 불과했습니다. 산전수전이란 산전수전은 다 겪었다고 생각했고, 감히 자신을 품으려던 사람들의 그릇은 하찮기 그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어긋났다고 느낀 순간엔 이미 늦었습니다.
내로라하는 배우들 가운데에서 브래들리 쿠퍼는 단단한 중심을 잡고, 누구 하나 허투루 낭비되는 일 없이 모두가 각자의 자리를 지킵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 특유의 자극적인 연출과 20세기의 독심술이 만난 몽환적인 화면과 전개는 비교적 전형적인 기승전결에 고유의 색을 부여하죠.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와 요소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서로의 존재를 돕는 구조입니다.
한없이 만만해 보이는 외양에 속아 분수를 잊기는 쉽습니다. 겉은 그렇게 잘 읽어내는 사람이 속은 냄새조차 맡지 못한다는 역설은 인간의 본성이자 반복되는 역사입니다. 영화는 그를 애써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저 보여줍니다. 안다고 잘 하는 것도, 모른다고 못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특별하다는 희극은 누구도 특별하지 않다는 비극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