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새와 향기 사이의 비린내
2004년 소설 <고래>로 이름을 떨친 천명관 작가의 영화감독 데뷔작, <뜨거운 피>입니다. 작가가 되기 이전부터 꿈꿔 온 영화감독의 길에 마침내 발을 내딛었네요. 2016년 출간된 김언수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정우, 김갑수, 최무성, 지승현, 이홍내, 윤제문 등이 함께했습니다. 포스터의 생김새로 보나 제목으로 보나 얼마 전 개봉된 <경관의 피>와 은근히 겹치는 곳이 많아 보이지요.
부산 변두리 작은 포구 구암의 절대적인 주인 손 영감, 그의 밑에서 오래도록 수족으로 일해 온 희수. 무엇 하나 이뤄낸 것 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건달 짓이 희수는 지긋지긋하기만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구역을 물색하던 영도파 건달들의 눈에 구암이 들어오고, 영도파 에이스이자 희수의 오랜 친구 철진이 희수에게 은밀히 접근하며 누구도 도망칠 수 없는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죠.
항구와 남자들입니다. 동종 영화들은 나열하면 입만 아프죠. 인물 관계도도 항상 비슷합니다. 우리의 주인공은 한때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무서웠던 보스의 곁을 극진히 지키며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신뢰 관계를 쌓은 인물이죠. 지금의 보스가 은퇴하면 자연히 조직을 물려받을 위치와 인덕을 모두 갖추었지만, 누가 등 떠밀어서 앉히기 전까지는 딱히 보스의 자리를 탐하지 않는 인내심도 갖고 있습니다.
주변엔 자리 하나 준다고 하면 언제 어디서든 칼을 빼들 준비가 된 사람들뿐이지만, 어째 우리의 주인공은 개중에서는 가장 유하디 유해 피를 보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족애, 동료애, 의리 등 그래도 사람다운 구실 정도는 잊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항상 친구와 스스로에게 되뇌이죠. 뻑하면 피바다가 되는 동네에서 관객들이 그나마 이입하기에 가장 좋은, 혹은 유일한 인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각본은 이 바닥에서 그런 인격자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얼핏 잘 풀리는 것 같다가도 결국 우리의 주인공도 똑같은 조직원이라는 씁쓸한 반성도 내비쳐야 하고, 권력를 가운데에 두고 벌이는 음모와 배신 끝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교훈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피를 묻히기 싫어하는 주인공을 사지로 내몰아 결국 피를 보게 만드는 것이 이런 영화들의 교과서적인 접근 방식이죠.
<뜨거운 피>도 그 공식을 전혀 벗어나지 않습니다. 정우의 희수는 손 영감을 아는 사람들은 물론 손 영감 본인까지도 인정하는 조직의 2인자입니다. 하지만 그 바닥의 그 누구보다 인간적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 넘어서는 안 될 선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조직 생활을 하면서 갖기 싫어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인연들을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아낍니다.
최무성의 용강, 지승현의 철진, 이홍내의 아미 등 굵직한 조연들은 모두 희수가 내밀히 갖고 있던 각기 다른 얼굴들을 관객들에게 내보일 수단이자 촉매제입니다. 용강에겐 업계 경쟁자, 철진에겐 20년지기 친구, 아미에겐 피를 섞지 않은 아버지죠. 너무나도 뚜렷하고 분명하게 나눠 가진 역할들 덕분에 그렇게까지 많지 않은 머릿수로도 다양한 그림을 뽑아낼 수 있는 구성입니다.
인물이 아닌 사건에 주목했다면 서로와 서로가 따로 노는 그림이 되기 딱 좋은 접근입니다. 실제로 극중 일부 사건의 경우 다른 사건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 존재 이유가 애매한 경우도 있죠. 언급한 세 조연 이외에 허동원의 도다리나 윤제문의 빚쟁이(?), 백수희의 제니 등이 대표적인데, 통째로 덜어내도 큰 지장이 없을 인물들을 그렇지 않아 보이게 하려 다른 인물들과의 접점을 억지로 만들어준 듯합니다.
그러나 <뜨거운 피>는 매 순간 희수라는 중심점을 잊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모든 사건들은 그저 상황을 전진시키기 위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희수라는 인물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희수와 무관하게, 희수가 모르게 흘러가는 사건은 대화로만 언급될 뿐 직접적으로 러닝타임을 차지하지 않음이 그 증거죠. 소설의 주인공을 영화의 주인공과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지점입니다.
때문에 동종 영화들과 거의 비슷한 구성과 전개임에도 그를 상회하는 흡인력을 지닙니다. 온전히 주인공의 시점에서 주인공의 내면이 움직이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체감할 수 있죠. 비록 그렇게 흘러가게끔 하는 사건들의 신선함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이런 구성을 보고 있자면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으나 매 순간이 놀라움으로 가득하다는 감독의 말이 아른거립니다.
영화의 아주 일부만 보아도 전체를 짐작할 수 있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나마 특정한 곳을 보아야 짐작할 수 있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영화의 어느 곳을 보든 상관없는 영화가 있죠. <뜨거운 피>는 애석하게도 후자에 속하는 영화지만, 최소한 그 후자에 속하는 영화들 가운데에서는 가진 재료들로 최대한의 결과물을 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