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공간 저 구석으로
세계관을 확장하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스파이더맨과 닥터 스트레인지를 내세워 멀티버스를 양지로 꺼내 온 디즈니가 이번엔 <토이 스토리>로 돌아갔네요. <월-E>의 단편이었던 <번-E>로 감독 자리에 데뷔한 앵거스 맥클레인의 <버즈 라이트이어>입니다. 포스터에 적혀있다시피 원제는 그냥 <Lightyear>지만, 국내에선 인지도를 우려했는지 <버즈 라이트이어>라는 풀 네임으로 개봉했네요.
미지의 행성에 좌초된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희망, 우주비행사 버즈 라이트이어. 특수 설계된 우주선을 끌고 하이퍼 스피드에 다다르기만 하면 모두를 구할 수 있지만, 부족한 자원과 기술력으로 번번이 실패를 맛봅니다. 설상가상으로 한 번 시도할 때마다 서로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 탓에 버즈는 자신의 친구들을 하나둘 떠나보내고, 너무나도 낯설어져 버린 곳에서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죠.
<토이 스토리>는 3부작으로 우주 명작 대열에 합류했던 시리즈였습니다. 그러나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포기할 수 없었던 디즈니와 픽사는 기어이 4편을 만들었죠. 물론 괜찮은 영화였지만,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 4편의 존재 자체가 구설에 올랐습니다. 심지어 4편을 재미있게 본 관객들 중에서도 영화는 좋았으나 3부작으로 마무리되었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을 정도였죠.
이번 <버즈 라이트이어>는 어쩌면 그 의견이 반영된 결과물입니다. <토이 스토리> 시리즈를 이제는 역사 속에 고이 모셔둘 대담함까지는 없지만, 그렇다고 4편에 이어 5편을 만들 뻔뻔함(?)까지도 가지 못했죠. 3편까지의 주인공인 앤디가 버즈 장난감을 산 이유라며, 바로 그 앤디가 가장 좋아했던 영화라며 내놓은 것이 바로 영화 속 영화인 <버즈 라이트이어>였으니까요.
그렇게 <버즈 라이트이어>는 우리가 아는 바로 그 버즈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앤디가 사는 세상에 버즈 라이트이어 장난감이 출시된 이유가 바로 이 영화라고 주장하죠. 잘만 되면 카우보이 우디는 물론 제시나 렉스까지, 그야말로 황금 거위를 낳는 황금 거위(!)를 만들어낸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무릎을 탁 쳤을 설정입니다.
시간 팽창은 개념 자체가 원체 흥미로워 우주 기반 창작물에서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소재입니다. 우주에 몇 분 다녀왔더니 지구의 시간은 몇 년이 흘러 있다니, 액션부터 로맨스까지 뻗을 수 있는 가지가 무궁무진하죠. 아마 가장 대중적인 곳이라면 <인터스텔라>에서들 본 기억이 있을 겁니다. 쿠퍼와 아멜리아가 미지의 행성에서 탈출하는 동안 같은 우주선에 타고 있던 로밀리는 폭삭 늙은 장면이 있었죠.
보통은 주인공을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고립시키려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소재로, <버즈 라이트이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작 몇 번의 비행 동안 신참 중 신참이었던 동료는 베테랑이 되어 은퇴하고, 갓 연애를 시작한 동료의 아이는 어느새 어엿한 성인이 됩니다. 나는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며 제자리에 머무는 동안 세상은 나를 두고 너무나도 빨리 달려가 버리죠.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점은 그 곳입니다. 옆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고, 세상엔 아는 것이 없습니다. 평생 하나의 목표만 보고 달려왔는데, 이제는 그만두고 싶어도 새로 할 일은커녕 그만두겠다고 말할 사람조차 없습니다. 유일한 목표를 성공으로 이끄는 것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금의, 나의 유일한 존재 이유가 되어 버렸습니다.
출발점은 그럴듯합니다. 지금까지도 심심하면 언급되곤 하는 <업>의 오프닝 시퀀스 향기도 살짝 나고, 다름아닌 디즈니 픽사 영화인지라 이걸 어떻게든 발전시켜 또 대단한 이야기를 들려주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했던 일상조차도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특별함을 창조한 그들이 이렇게까지나 특수한 환경을 준비했다면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해지죠.
그런데 막상 그를 뒤따르는 것은 아주 평범하고 예측 가능한 우주 활극입니다. 그냥 대부분의 동종 영화들이 그러하듯 우주 여행을 하다가 미지의 행성에 좌초되었다고 하면서 시작해도 별다른 차이가 없을 내용이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동료가 되고 악당과 대립합니다. 선과 악의 흑백 논리에 그칠 만큼 단순하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만의 매력을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토이 스토리>라는 안경을 빼고 보면 그 이하로 떨어집니다. 혼자 영웅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버즈에게 동료의 소중함을 일깨운다는 전형적인 이유로 등장하는 인물들인데, 쓸모도 매력도 없기로는 근래 모든 픽사 영화들 중에 손에 꼽는 수준입니다. 처음부터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완벽했던 사람을 억지로 부족하게 만든 뒤 이것 보라며 우기는 그림에 가깝죠.
악당인 저그 쪽이 그나마 낫지만, 어디까지나 방금 언급한 그 동료들에 비해서 나을 뿐입니다.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대립이 아니라 각자의 입장에서 옳은 신념과 옳지 못한 신념의 대립을 그리는 영화들이 많아졌죠. 보통 전자에서 후자임이 밝혀지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어째 이번 영화의 버즈와 저그는 후자인 척 하는 전자입니다. 뜻대로 안 되니 판 엎고 다 쓸어버리겠다는 행보는 꽤나 실망스럽죠.
그렇다면 남은 것은 영화의 제목이기까지 한 버즈 라이트이어뿐인데, 무대도 동료들도 시원찮은 마당에 영화의 주제까지 인물과 인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혼자서 빛나기는 영 쉽지 않습니다. <토이 스토리> 시리즈 팬들의 향수를 자극할 몇몇 장면이나 대사들로 간신히 최소한의 매력을 유지하고 있을 뿐, 시리즈가 뻗어나갈 새로운 가지 역할은 꽤 미미한 편이죠.
갈수록 노골적인 디즈니의 장난감 판매용 캐릭터인 삭스는 각본이 설득력 앞에 멈춰설 때마다 나타나 상황을 해결합니다. 여기서의 해결은 유쾌한 활약보다는 이제는 놀라운 수준에 이른 태연함에 가깝죠. 만화적 허용도 한두 번이지, 이제는 대강 귀여운 껍데기 씌워 놓았으니 말이 되게 보이려는 노력조차 딱히 하지 않습니다. 삭스에게 더 커다란 팔다리만 있었어도 버즈조차 필요없었을 겁니다.
실사만큼의, 어쩌면 실사 이상의 때깔을 자랑하는 몇몇 장면에서의 기술력은 분명 칭찬할 만합니다. 버즈 라이트이어의 목소리를 연기한 크리스 에반스의 팬들이라면 즐길 포인트도 하나 더 있었겠구요. 그러나 디즈니 픽사의 신작 애니메이션이 요즘 점점 흔해지고 있는 금수저 속편의 전철을 조금이라도 밟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실망스러운 흥행 성적이 그닥 놀랍지는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