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셉에 잡아먹힌
2018년 <마녀>가 4년만에 돌아왔습니다. 당초 제작 단계에서부터 3부작을 목표로 했다고 했지만, 1편의 318만 명이라는 흥행 성적도 살짝 애매했던 와중 제작사인 워너브라더스 코리아가 한국에서 철수하며 큰 위기를 겪었죠. 그럼에도 어찌저찌 박훈정 감독이 다시 한 번 메가폰을 잡아 2편으로 돌아왔으니, 속편을 기다렸던 팬들에게는 일단 해피엔딩이 되었습니다.
자윤이 사라진 뒤, 정체불명 집단의 무차별 습격으로 실험실이 초토화됩니다. 그곳에서 홀로 살아남은 소녀는 난생 처음 세상으로 발을 내딛고, 우연히 만난 경희의 도움으로 농장에서 지내며 따뜻한 일상에 적응해가죠. 그러나 그런 그녀의 뒤를 쫓는 세력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소녀의 숨통을 조이고, 다가오는 위협 앞에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소녀의 진짜 힘이 눈을 뜹니다.
예고편을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납니다. 초능력물도 드물고 시리즈물도 드문 한국 영화계에서 초능력물 시리즈라면 뭐가 어찌됐든 기대작 목록에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전편은 김다미라는 신예를 발굴해낸 작품이기도 하고, <대호>와 <브이아이피>가 <신세계>의 아성을 따라잡지 못하던 중 나왔던 영화였기에 이유야 찾으면 많았죠. 그런 영화의 예고편이라고 하니 호기심이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첫인상은 꽤 당황스러웠습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실험체 이름이 아크 원 데이텀 포인트라는데, 자막이 없으면 알아듣지도 못할 이름인데다 자막을 읽으면서 이게 이름인가 싶은 생각에 또 기억이 안 납니다. 뭐가 정신없이 흘러가더니 20세기 감성인지 빨리감기한 카메라워크에 슬슬 밈이 될락말락하는 갓챠맨으로 마무리하니 이게 맞나 싶은 생각만 남았더랬죠.
잘 보면 제목도 <마녀 2>가 아니라 <마녀(魔女) Part2. The Other One>입니다. 공식 제목은 아니지만 제목 밑에 작게 한두 마디 더 덧붙이는 경우는 가끔 본 적이 있어도, 모든 포스터와 예고편은 물론 아예 데이터베이스 표기까지 이토록 당당한 제목은 또 처음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이 허랑방탕한 제목에서부터 영화의 방향성이 아주 잘 드러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 속편은 박훈정 감독의 전편들이 가졌던 단점들을 모두 모아 <마녀> 세계관의 껍데기를 씌운 작품입니다. 주로 <브이아이피>에서 가져온 것들이 많죠. 도대체 등장하는 사람들마다 입에서 떨어지질 않는 욕, 술, 담배, 외국어에서 출발합니다. 욕 좀 그만 하고 술 좀 그만 마시고 담배 좀 그만 피우고 영어 중국어 좀 그만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번갈아 하다 보면 영화가 끝납니다.
그 캐릭터들이 써내려가는 이야기는 '실험체'를 소재로 했을 때 떠올릴 법한 아주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지막지한 힘을 지닌 존재가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의 눈에 띕니다. 마침 그 사람들은 빚쟁이니 뭐니 해서 나쁜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죠. 자신도 쫓기는 와중에 주인공은 그들을 돕고자 자신의 힘을 사용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 또한 존재를 노출하며 둘의 문제가 하나로 합쳐집니다.
거의 모든 캐릭터들이 똑같은 단점을 공유하기에 머릿수는 많아도 천편일률적이라 오히려 다양성은 반비례합니다. 착한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끼리 똑같고 나쁜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끼리 똑같습니다. 분명 나오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은데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정확히는 알 필요가 없습니다. 올 블랙 롱 코트 혹은 가죽 재킷, 부츠, 마스크로 맞춰 입고 똑같이 나와서 똑같이 죽을 운명인 탓이죠.
15세 관람가를 어떻게 받았는지 모를 유혈이 낭자하면 일단 센 척 한 번씩 합니다. 눈 앞에서 터지고 찢기는데 역시 이런 게 재밌다는 듯 씩 웃으며 입꼬리를 올리죠. 고개도 까딱거리면서 있는 무게 없는 무게 다 잡다가 각자 예정된 운명을 맞이합니다. 만화에서 2D 텍스트로 읽었을 때에나, 그것도 그 전에 일정한 노력으로 소위 말하는 뽕을 좀 채워 준 뒤에야 통할 법한 연출이 아무 예고도 없이 쏟아지죠.
그 가운데에서 우리의 새로운 주인공은 제대로 된 주인공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엄청난 힘을 숨기고 있지만 세상 물정 몰라 순진무구하게 식탐을 부리고 눈 끔뻑대는 또 다른 전형성으로 가득하죠. 자다 깨기만 몇 번을 반복하고 하얀 눈밭에서 시뻘건 피를 뒤집어쓰고 걷는, 필요 이상으로 긴 감독의 시각적 연출 욕구를 채워준 뒤엔 각본의 주인공 역할은 전혀 해내지 못합니다.
그 빈 자리는 누구도 채우지 못합니다. 주인공이 없습니다. 신시아, 성유빈, 박은빈, 이종석, 조민수, 서은수, 채원빈, 진구, 저스틴 하비 등 존재감 면에서나 심지어 분량 면에서나 주인공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더 나와야 할 사람은 덜 나오고 덜 나와야 할 사람은 더 나오며 굳이 맞추지 않아도 될 균형을 맞춥니다.
그 와중에 속편을 향한 열망은 1편보다도 더 급박해 보입니다. 던지는 떡밥은 많은데 설명을 아낍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큰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설명해 주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떡밥들을 굳이 다음에 만나면 말해 주겠다며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복선은 그것이 복선인지조차 모르게 던져졌을 때 가장 큰 효과를 내는데, <마녀 2>는 정반대의 길을 향하죠.
장점은 줄어들고 단점은 커졌습니다. 커져도 너무 커졌습니다. 유니언, 초인간주의, 토우 등 시리즈 세계관의 벽돌이 될 고유명사들을 한아름 들고 나와서 던져 놓는 데만 정신이 팔렸을 뿐, 쌓아야 하는 모양새는커녕 사이사이 발라야 하는 모르타르도 까먹은 것처럼 보이죠. 1편을 본 직후엔 2편이 나올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2편을 본 지금은 3편이 나와야 하나 싶은 의문만이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