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시대, 그 시대
2013년 <위대한 개츠비> 이후 장편 영화로는 9년만에 돌아온 바즈 루어만 감독의 신작, <엘비스>입니다.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없는 포스터 때깔만 보아도 감독의 이름을 얼추 짐작할 수 있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브래드 피트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던 텍스 역의 오스틴 버틀러를 주연으로 톰 행크스, 올리비아 더용, 리차드 록스버그, 켈빈 해리슨 주니어 등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신나는 음악과 파격적인 퍼포먼스, 강렬한 매력으로 데뷔와 동시에 단숨에 대중을 사로잡은 전설의 그 이름, 엘비스 프레슬리. 미시시피의 투펠로, 테네시의 멤피스, 네바다의 라스베가스를 거치며 인종과 문화를 엮고 시대의 아이콘으로 거듭난 그의 곁엔 그 모든 것이 자신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수수께끼의 남자 톰 파커 대령이었죠.
초반 장면부터 익숙한 향기가 납니다. 엘비스의 얼굴을 보려 애쓰지만 이리저리 가려서 보지 못하다가 마침내 정면 모습이 등장하며 첫 무대가 시작되는데, 목소리와 몸만 슬쩍슬쩍 보여주다가 이보다 화려할 수 없는 등장을 보여주었던 <위대한 개츠비>가 떠오르는 연출이죠. 배경만 움직이는 듯한 자동차 운전 장면이나 빛 그득한 무대 등 나머지 장면에서도 잔향은 이어집니다.
예술가 중에서도 뮤지션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걸을 수 있는 길은 크게 두 개가 있습니다. 음악 영화와 전기 영화죠. 물론 아주 뚜렷하게 구분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은 지금의 관객들에게 좀 더 친근한 곡들이 많은 경우는 전자에 속하게 됩니다. 연출 면에서도 인물의 삶을 조명하는 동시에 몇몇 곡들은 힘을 빡 주어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순간들을 만들어내구요.
라미 말렉이 프레디 머큐리를 연기한 <보헤미안 랩소디>가 그 사이에서 음악 영화 쪽으로 기운 영화라면, 오스틴 버틀러가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기한 이번 <엘비스>는 그 사이에서 전기 영화 쪽으로 기운 영화가 되겠습니다. 전작 <위대한 개츠비>보다도 18분이 더 긴, 장장 159분의 러닝타임만 보아도 최대한 많은 것을 보여주고픈 감독의 의지를 엿볼 수 있죠.
그 긴 시간 동안 <엘비스>는 정말 자신이 보여주려고 마음먹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 어린 시절 흑인 공동체에서 자라며 운명처럼 음악을 맞이한 순간부터 42세의 나이로 누구보다 큰 족적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순간까지, 여느 영화들처럼 특정한 순간이 아닌 인물과 그의 삶 전체를 남김없이 꺼내놓죠. 기승전결, 흥망성쇠, 희로애락, 생로병사 등 정말로 많은 것을 아우릅니다.
몇 가지 사건들을 다루고 있기는 하나, 딱히 어느 한 곳에 힘을 주지는 않습니다. 정확히는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인물을 가운데에 굳게 뿌리내린 뒤 흘러가는 사건들과의 상호작용하며 자라나는 모습을 보여주죠. 시골 청년이 슈퍼스타가 되고, 풋사랑에 취하던 소년이 남자가 되고, 연예인이자 엔터테이너였던 사람이 사회적 영향력을 인지합니다. 영화는 이 방향성을 한껏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죠.
그 옆엔 톰 행크스가 연기한 톰 파커가 있습니다. 제목도 <엘비스>인 엘비스 프레슬리 영화임에도 내레이션으로 깔리는 화자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아닌 톰 파커죠. 혹자는 자신을 이 이야기의 악인이라 비난하지만, 본인이야말로 세상에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보물을 선물한 영웅이라 주장하는 인물입니다. 연예인 머천다이즈(굿즈), 위성 중계 공연 등을 처음으로 고안한 것을 보면 사업 수완 하나는 대단하죠.
<엘비스>는 누가 봐도 엘비스의 등골과 피를 빨아먹고 있는 그의 자기 변호를 토대로 엘비스라는 인물의 깊이를 더하려 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곁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착취하고 있음에도 엘비스는 오로지 팬들의 사랑을 위해, 무대 위의 환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며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그런 그의 빛나는 모습을 더욱 빛나게 하려 만들어졌음을 숨기지 않죠.
지금까지의 똑같은 감상을 바탕으로 정반대 의견을 낼 수도 있습니다. 뚜렷한 지향점이 없어 159분의 러닝타임은 꽤나 건조하게 느껴지기 쉽습니다. 대부분은 엘비스의 소소한 공연과 소소한 갈등을 샌드위치 재료처럼 번갈아 끼운 형태고, 하다못해 상업 영화의 대미를 장식할 하이라이트 무대도 없으니 드라마 시리즈를 편집도 없이 쭈욱 이어붙여 놓은 것 같기도 하죠.
만연한 인종차별, 고압적이고 보수적이었던 지도층 등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다가도 프리실라와의 뜨거운 사랑, 하나뿐인 딸 리사 마리를 아끼는 부성애, 어릴 적부터 모든 것을 의지한 부모님 등 엘비스의 개인사가 뒤섞여 산만하기도 합니다. 많은 것을 볼 수 있지만, 그만큼 어느 하나 제대로 훑기보다는 발만 살짝씩 담그는 모양새라 좋든 싫든 시선은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죠.
톰 파커를 화자로 내세운 것도 그닥 훌륭한 선택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악인 중에서도 스스로의 논리와 신념으로 수단과 결과 둘 중 하나는 일말의 설득에 성공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는 요즘,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신인들을 꼬드겨 계약서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뻔한 캐릭터는 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톰 행크스의 분장도 시원찮아 마침내 엘비스와 재회한 포레스트 검프 쯤의 배우 개그는 칠 수 있겠네요.
이처럼 조연들은 애초에 별다른 스포트라이트 자체를 받지 못하고 톰 행크스마저 기대한 이름값을 내지 못하는 와중, 각본을 통째로 짊어진 엘비스 프레슬리 역의 오스틴 버틀러는 그래도 충분한 존재감을 뽐냅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미디어에 노출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자칫하면 패러디 혹은 흉내에 그칠 수도 있었지만, 목소리와 외모를 비롯한 엘비스의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자기 색을 지키죠.
'바즈 루어만의 엘비스 프레슬리 영화'라는 문장에서 기대한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엄청나게 화려한 것을 전제로 그만큼 극과 극으로 갈라진 톱스타의 인생사를 다룰 것처럼 보였지만, 의외로 모난 곳 없이 잔잔한 가운데 엘비스라는 만인의 영웅을 상기하죠. 엘비스 프레슬리나 바즈 루어만 중 최소 한 쪽에라도 일말의 흥미를 갖고 있어야 매끄럽게 진입할 수 있는 영화가 되겠습니다.
+ 시사회가 열린 코엑스 메가박스 돌비 시네마 입장 통로도 <엘비스>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화려하니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