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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Aug 12. 2022

<비상선언> 리뷰

다부진 이륙과 헝클어진 착륙


<비상선언>

★★☆


 CJ의 <외계+인>, 롯데의 <한산>에 이어 여름 대작 반열에 이름을 올린 쇼박스의 <비상선언>입니다. <관상>의 한재림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김남길, 임시완, 김소진, 박해준, 설인아, 문숙 등 면면만 놓고 보면 이번 여름 가장 묵직한 영화라고 봐도 무방하겠죠. 경쟁작들과 마찬가지로 제작비는 250억 원에서 300억 원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개봉은 오는 8월 3일로 잡혀 있습니다.



 베테랑 형사 팀장 인호는 비행기 테러 예고 영상 제보를 받고 사건을 수사하던 중 용의자가 실제로 KI501 항공편에 타고 있음을 파악합니다. 딸의 치료를 위해 비행 공포증에도 불구하고 하와이로 떠나기로 한 재혁은 주변을 맴도는 낯선 이가 영 신경쓰이죠. 인천에서 하와이로 이륙한 KI501 항공편에서 원인불명의 사망자가 나오고, 비행기 안은 물론 지상까지 혼란과 두려움의 현장으로 뒤바뀝니다.


 자연재해를 다룬 재난 영화는 이제 한두 편씩 나오는 것도 같지만, 테러를 소재로 한 영화는 <더 테러 라이브>, <PMC: 더 벙커> 등이 떠오르긴 하나 아직 상대적으로 드문 편입니다. 특히 비행기가 크게 주된 이동수단이 아니다 보니, 찍으려고 하면 제작비가 천정부지로 솟구치다 보니 항공 테러 사건을 소재로 하기는 더욱 어렵겠죠. 예상보다 훨씬 높은 제작비 규모만 보아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테러와 재난 영화의 공통점이라고 하면 크게 두 가지 연출 방식이 있다는 점이겠지요. 정확히는 재난을 다루는 방식이 되겠습니다. 하나는 재난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영화의 볼거리와 규모를 키우는 방식입니다. 재난, 더 큰 재난을 보여주어 영상미로 관객을 압도하는 영화죠. 롤랜드 에머리히를 필두로 한 할리우드의 많은 재난 영화가 그랬고, 국내에도 <백두산>이나 <해운대> 등이 그랬습니다.


 다른 하나는 재난에 대처하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연출이 있습니다.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은 가장 깊은 곳에 감춰왔던 본성을 드러내고, 그 군상과 단면으로 인간 본연의 무언가에 접근하려는 방식이죠. 목숨이 오간다면 누구든 어떻게든 살아 보려 하겠지만, 그 살아 보겠다는 의지는 너무나 많은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선과 악의 경계에서도 누구도 쉽게 손가락질할 수 없는 그림이죠.



 <비상선언>은 최대한 많은 장르적 색채를 가져가려 합니다. 임시완의 류진석이 중심에 놓이는 초반부는 테러를 소재로 한 범죄 영화에 가깝습니다. 150명이 탄 비행기에 테러를 감행하는데 이유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송강호의 구인호는 우연히 얻은 단서를 쫓아 그의 뒤를 밟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기에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서슴지 않는지 밝혀내는 수사물을 따라가죠.


 그런데 이것이 완전히 밝혀진 중반부부터는 장르의 방향을 꽤 크게 선회합니다. 비행기는 '누구도 마음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공간'의 역할만 수행할 뿐, 극한 상황에서 나오는 인간들의 본성이 본격적인 소재가 됩니다. 여느 안정적인 재난영화들이 그러하듯 지금껏 별 말 안 하고 조용히 앉아들 있던 조연과 단역들이 목소리를 한 마디씩 내기 시작합니다.



 <비상선언>의 캐릭터는 결코 적지 않습니다. 하늘 위에도 있고 땅 위에도 있고, 비행기 꼬리에도 있고 머리에도 있습니다. 각자가 각자의 사연과 이야기를 갖고 있습니다. 같은 상황에 각자의 주장과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후반부 영화는 여기에 집중합니다.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 인간이란 얼마나 유약하고, 얼마나 악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또 얼마나 선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악함이 세상을 물들이는 날이 있지만, 깊이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선함이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날도 있습니다. 평상시라면 스스로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악당이 되고, 또 영웅이 됩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소수입니다. 하지만 그 소수는 명찰을 바꿔 달 수 있습니다. 어제의, 오늘의, 내일의 내가 그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분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알아들을 때까지 모두의 입을 빌려 떠들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이 광경을 봤으면 당연히 알아들었으리라는 기대조차 되지 않는지, 화면 속 누군가가 악을 쓰고 있으면 또 다른 누군가가 핀잔을 주거나 부끄러운 줄 알라며 일침을 가하는 그림이 반복됩니다. 이쯤에서 멈춰야 할 것 같으면 꼭 한 마디씩, 한 장면씩 덧붙여 러닝타임이 꽤 길게 느껴지죠.


 후반부는 영화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것이 따로 놉니다. 안 그래도 한 명 한 명이 굵직한 등장인물들은 서로와 전혀 섞이지 않습니다. 초반부는 류진석의 뒤를 쫓는 구인호가 주인공이 되었다가, 후반부는 조종실에서 김남길의 최현수를 옆에 둔 이병헌의 박재혁이 주인공이 됩니다. 한 쪽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와중엔 다른 한 쪽은 있었는지조차 까먹을 지경입니다. 전도연의 김숙희와 박해준의 박태수는 계속 겉돌죠.



 긴장 상황 또한 일관성이 없습니다. 숨만 쉬어도 사람이 죽어나가는 상황만으로도 충분한데, 마치 모두가 그 상황은 이미 졸업한 듯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미국에 착륙하려 하고, 일본에 착륙하려 하고, 한국에 착륙하려 하면서 허가가 안 나고 총탄이 날아오고 여론을 마주합니다. 줄기나 뿌리는 없고 그저 러닝타임만 때웁니다. 언제는 연료가 없다고 그렇게 난리를 피우더니 정말 멀리도 갑니다.


 이러니 집중을 유지하려는 1차원적인 연출도 지나치게 남발합니다. 수사를 하다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하지만 일단 관객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등장인물 간 대화가 진행되다가 마지막에 뭔가 중요한 말이 나오는데 일단 관객들에게는 들려주지 않습니다. 시선을 의도적으로 다른 곳으로 돌려 호기심이 좀 커졌다 싶으면 그 때 보여주고 들려줍니다. 알맹이가 아니라 껍데기로 눈길을 붙잡으려는 시도죠.



 그 정점에서는 기어이 장르를 잊고 신파로 나섭니다. 보여줄 거 다 보여줬으니 지금껏 나온 걸 모두 합쳐 눈물샘을 정조준합니다. 새로운 상황과 직전의 상황이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는 구성의 끝을 찍죠. 선악이라는 인간적 가치마저도 운명 앞에 얼마나 가냘픈 것인지, 인간론 교양 수업을 방불케 하는 대사의 향연은 오로지 이병헌의 연기력이 간신히 지탱하는 수준입니다.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굵직한 주조연들, 그리고 재난 상황에서 공포에 질리고 고함을 지르는 단역들을 모두 돌아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장면 하나하나의 의미와 의도는 분명하고 완성도도 갖추고 있지만, 연결성이 지나치게 떨어집니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설명되는 '비상선언'이라는 소재는 잊혀지고, 그저 비슷한 극한 상황만 있으면 얼마든지 같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는 점이 치명적입니다.



 출발점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비행기라는 공간, 류진석이라는 인물 대신 후반부에 한아름 준비해 둔 교훈과 가르침을 영화 전체의 뿌리와 양분으로 삼았습니다. 충분히 매력적이고 흡인력 있는 소재들을 뒤로 밀어둔 채 예측 가능하고 평범한 것들로 뒤를 채웠습니다. <판도라>, <부산행>, <감기> 등의 짭짤한 흥행을 떠올려 보면 어쩔 수 없었나 싶기도 하지만, 먼저 보여준 잠재력이 아쉬운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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