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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Oct 29. 2022

<샌드맨> 리뷰

비틀린 곳의 뒤틀린 것들


<샌드맨>

(The Sandman)

★★★☆


 꽤 많은 사람들이 2022년 넷플릭스 최대 기대작으로 꼽았던 <샌드맨>이 지난 8월 5일 공개되었습니다. 닐 게이먼과 DC 코믹스가 내놓은 동명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했고, 그 인기가 워낙 탄탄했던 터라 영상화 프로젝트는 오래 전부터 논의되어 왔죠. 2016년 즈음 조셉 고든 레빗이 연출과 주연까지 맡은 영화화가 추진되었다가 무산되었으나, 다행히도 아주 늦지 않게 10부작 TV 시리즈로 찾아왔습니다.



 세상에는 저마다의 목적과 의지를 지닌 일곱 관념의 구체화가 존재합니다. 운명, 죽음, 파괴, 욕망, 절망, 분열, 그리고 꿈이죠. 영원 일족이라고 불리는 이 일곱 개념들 중 꿈의 군주가 바로 샌드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모르페우스였죠. 가장 취약했던 순간 인간 마법사의 계략에 빠진 그는 100년 동안 감금되었다가 마침내 풀려나고, 공백의 기간 동안 벌어진 혼란을 잠재울 여정을 떠납니다.


 2010년대를 지나 2020년대에 들어서서는 정통 판타지물을 찾아보기도 점점 어려워지는 듯합니다. 스스로의 법칙을 하나부터 열까지 창조해야 하는 판타지 세계관 특성상 무조건 시리즈물을 지향해야 하는데, 아무런 보장도 되어있지 않은 첫 영화 혹은 첫 편부터 그렇게까지 거대한 비용을 감수하기란 쉽지 않죠. 몇천만, 심지어는 몇 억 부가 팔렸다던 인기 원작 바탕 작품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샌드맨>도 원작이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못지않거나 이상의 후광을 업고도 참패한 영화나 시리즈는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넷플릭스라는 큰손은 <샌드맨>의 실사화에 대단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톰 스터리지를 주인공으로 보이드 홀브룩, 비비안 아쳄퐁, 데이빗 듈리스, 제나 콜먼, 그웬돌린 크리스티, 찰스 댄스, 쿄 라 등과 함께 무려 회당 200억 원을 들였죠.


 판타지 영화가 실패하는 가장 흔한 이유라고 하면 개연성과 일관성의 부족이 있겠습니다. 어느 장르건 개연성이나 일관성이 부족하면 실패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세계관의 규칙을 스스로 창조하는 판타지 영화 특성상 이 단점에 더욱 취약하죠. 온갖 능력을 지닌 온갖 물건이나 존재들을 상정하는 곳인 만큼, 재료 하나하나를 만들고 집어넣는 데에는 교묘하고 신중한 계산이 필요합니다.



 당장 마법만 해도 그렇습니다. 손가락만 까딱해서, 주문만 중얼거려서 가능한 일이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을 너도 알고 나도 알고 관객도 아는 상황이라면 모든 상황에 굳이 마법을 쓰지 않는 이유를 억지로 만들어야 합니다. 투입되는 노력이나 재화가 결과보다 더 많다는 식으로 보는 사람을 설득해야 하죠. 비유하자면 날 수 있는데 걸어다니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실패한 판타지는 여기서 무너집니다. 설명되지 않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들이 하나둘 쌓이기 시작하면 이내 그를 통째로 외면하게 되고, 한 번 생긴 매립지는 점점 덩치를 키워 세계관을 통째로 잡아먹죠. 그렇게 되는 이유는 너무도 다양하고 복합적인데, 무너지기는 쉬운데 들어가는 노력은 지나치게 크다 보니 판타지 장르의 난이도 자체가 꽤나 올라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뻔한 설정 구멍을 막는 더 뻔한 방법이 있습니다. 더 대단한 것을 보여주어 시선을 돌리는 것이죠. 따지면 누구나 인정하지만, 그를 무릅쓸 볼거리를 선사하면 그만입니다. 독수리 택시(?)를 이용하지 않은 <반지의 제왕>이 그랬고, 더 좋은 전투기와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가지 않은 <탑건: 매버릭>이 그랬습니다. 창작물이 창작물인 이유를 스스로 증명한 영화들이죠.


 <샌드맨>은 바로 그 미묘한 경계선을 넘나드는 작품입니다. 이 쪽에서 보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데, 조금만 자리를 바꾸어 보면 이 시리즈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광경으로 가득합니다. 유치하지만 몽환적이고, 억지스럽지만 아름답기도 합니다. 스스로 만들고 제시한 규칙은 얼핏 우스울 정도로 단순하지만, 그를 세계관 전체를 걸고 지키는 모습에선 시선을 뗄 수 없습니다.



 열 개의 에피소드는 두세 편씩 묶여 작은 기승전결을 이룹니다. 샌드맨 모르페우스가 100년 동안 감금된 뒤 로드릭 버제스에게 벌을 주고 존 디와 맞선 뒤 조안나 콘스탄틴을 거쳐 로즈 워커를 찾습니다. 이어지지 않는 듯 이어지는 줄거리는 루시엔과 왕국을 재건하며 코린트인을 비롯한 악몽들을 상대하는 커다란 줄기를 따르죠. 짧은 호흡과 긴 호흡 모두 가져가며 시리즈 전체의 강약을 적절하게 조절합니다.


 설정이나 존재 자체의 매력이 상당합니다. 꿈결이라는 왕국에서 꿈 그 자체로 군림하는 모르페우스의 능력과 행적으로 '꿈'이라는 개념을 재정의하죠. 투구, 루비, 모래라는 3개의 도구를 다룬다는데, 물건의 선택에 있어 무작위하고 불분명한 기준에도 불구하고 그 광경 자체가 원체 특이하고 진지해 마냥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최소한 자신이 없어서 웃음을 흘리고 마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이죠.



 모르페우스와 같은 영원 일족인 '죽음', '욕망' 등을 구체화하고, 루시퍼가 다스리는 지옥이라는 공간을 표현하는 데에도 비슷한 단계가 뒤따릅니다. 일상적이거나 친숙한 무언가를 완전한 자신만의 방식 혹은 버전으로 해석, 각색, 표현, 묘사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죠. 때문에 뭔지 모르지만 익숙하고, 어디서 본 적이 있지만 신비롭다는 느낌을 항상 유지합니다.


 4화에서 모르페우스가 루시퍼와 벌이는 현실 게임(가장 오래된 게임)이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서로 개념과 이미지를 차례로 교차하며 겨루는 게임이죠. 나는 늑대라며 덤벼들면 상대 쪽에서는 나는 그 늑대를 잡는 사냥꾼이라며 응수하는 식입니다. 이렇게 문장으로만 놓고 보면 꽤나 뜬구름 잡는 모습이 될 수도 있으나, <샌드맨>은 이를 시리즈를 통틀어 기억에 남을 장면으로 만들어내죠.



 물론 여기서 기억에 남는다는 것은 사실 시각의 덕이 큽니다. 손꼽을 만한 다른 장면들도 마찬가지죠. 하나하나 심혈을 기울인 설정치고는 그것들끼리의 충돌은 다소 허무하거나 급작스럽게 마무리되는 순간이 많은데, 그를 <샌드맨>만의 화면으로 시각화한 덕에 여파가 덜합니다. 이마저도 반복되다 보면 무언가 대단한 것이 지나가고는 있으나 막상 돌이켜보면 아귀가 썩 잘 맞지는 않는다는 결론이 나기도 하죠.


 얽힌 이름들에 비하면 의외로 캐릭터의 힘은 크게 떨어지는 편입니다. 주인공 모르페우스 역의 톰 스터리지가 뿌리부터 줄기까지 단단한 토대가 되어 버티고 있지만, 그를 제외한 거의 모든 배우들은 비주얼을 비롯한 캐릭터의 개성 자체에 잡아먹히죠. 원체 현실과 괴리가 있는 존재들을 연기하려다 보니 서로 톡톡 튀려고 안달이 난 일일 역할극을 보는 것 같을 때가 많습니다.



 분명한 장점과 단점이 뚜렷하게 공존합니다. 한 쪽이 세력을 키우려고 하면 다른 한 쪽이 어깨를 붙잡죠. 그러나 어느 쪽으로 쏠리건 지금껏 보지 못했던 것을 한아름 보여주는 시리즈임엔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시리즈가 실사화된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구요. 그걸 충족시킨 것만으로도 <샌드맨>은 최근 제작된 모든 판타지 창작물에서 높은 자리를 가져갈 자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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