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킴지 Feb 28. 2023

<바빌론> 리뷰

그 시간 속 그 순간들


<바빌론>

(Babylon)

★★★★


 <위플래쉬>, <라라랜드>, <퍼스트 맨>의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내놓은 <바빌론>입니다. 본토에서는 지난 12월 23일 개봉되었으나 국내엔 해를 넘긴 뒤에야 개봉을 맞이했네요. 디에고 칼바, 마고 로비, 브래드 피트, 조반 아데포, 진 스마트, 리 준 리, 캐서린 워터스턴, 토비 맥과이어, 사마라 위빙, 올리비아 와일드, 스파이크 존즈 등 화려한 출연진과 무려 8천만 달러의 제작비가 함께했습니다.



 영화계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키우던 청년 매니 토레스. 그에게 영화란 상상하는 모든 것이 현실이 되는 마법과도 같은 존재였죠. 그러던 어느 날 한 파티에서 할리우드의 차세대 스타를 자처하는 배우 지망생 넬리 라로이, 이 시대 최고의 스타인 영화배우 잭 콘래드와 운명처럼 만나게 되죠. 드디어 꿈꾸던 세상에 한 발 다가선 매니 앞엔 모든 순간이 영화가 될 그 곳의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위플래쉬> 106분, <라라랜드> 127분, <퍼스트 맨> 141분에 이어 <바빌론>은 무려 189분입니다. 그 길다던 <어벤져스: 엔드게임>보다 8분이 길죠. 시리즈물이나 블록버스터도 아닌, 처음 보는 사람들만 가득한 영화가 3시간이 넘습니다. 거대자본 들이부은 볼거리로 러닝타임을 채우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저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모은 것이 그 정도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매니는 영화 일이 너무 하고 싶습니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은 영화를 사랑하는 마지막 단계가 다름아닌 영화를 만드는 것이며, 그 이상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것은 영화였고, 미래의 자신을 꿈꿀 수 있게 한 것도 영화였습니다. 그에게 영화란 잠시나마 현실로부터 벗어나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다른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한 마법의 집합체였죠.


 영화를 너무나 사랑한 그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합니다. 자신이 매 순간 너무나도 생경하게 느꼈던 그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사하고 싶습니다. 스크린 속에서 벌어지는 것이 무언가 의미가 있는 일임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영화의 역사에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자신이 그토록 동경해 마지않았던 것들 사이에 자신의 자취를 기록할 수 있다면 그보다 위대한 일은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 그의 앞에 넬리가 나타납니다. 스타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던 그녀는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합니다. 관계자들에게 잘 보여 배역을 따내려 초대장도 없이 파티에 왔지만, 누구 앞에서도 굽히는 법 없이 당당합니다.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기에 당당히, 보란 듯이 성공합니다. 증명은 진실이 아닐 때나 하는 것일 뿐, 나의 존재는 이미 진실입니다.


 매니와 넬리가 도달하려고 한, 그리고 도달한 곳엔 잭이 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잭은 누구나 우러러볼 정점에 선 인물입니다.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없고, 그의 한 마디면 업계 전체가 움직입니다. 신작을 찍었다 하면 세간의 화제가 되고 모두에게 또 다른 성공을 가져다줍니다. 사생활은 너저분하고 도덕적으로는 의지할 사람이 되지 못하지만, 그 역시 또 한 명의 스타죠.



 <바빌론>의 초기 홍보 카피는 'Always make a scene'이었고, 그는 '모든 순간이 영화가 된다'로 번역되었습니다. 티저 예고편 말미에 브래드 피트가 맡은 잭 콘래드는 '여긴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곳'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빌론>은 데이미언 셔젤이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곳에서 벌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이야기를 그립니다. 모든 사람들의 모든 희로애락이 한 곳에 있죠.


 그 곳에는 두 유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늘지만 긴 사람과 짧지만 굵은 사람들이죠. 전자는 스포트라이트의 바깥에서 자신이 지금 이 공간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만끽하고, 후자는 스타라고 불리며 스포트라이트 바로 아래에서의 순간을 누립니다. 별과 별이 아닌 것의 순간들이 모인 이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광경이자 구경거리가 되어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유희가 됩니다.



 극 초반부와 후반부에 반복되는 대사에서 나오듯 별이 아닌 사람은 별이 될 수 없고, 별인 사람은 별이 아닌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타고난 운명을 살아가며 시대에 배정되어 있는 각자의 자리를 가져갈 뿐이죠. 그러나 변할 수 없기에 슬픈 것이 아니라 그 곳에 각자의 자리가 있기에 기쁜 것입니다. 그 자리는 그 시간, 그 공간에 고정되어 그 자리에 앉는 본인조차 영영 바꿀 수 없습니다.


 중반부 진 스마트의 엘리노어와 브래드 피트의 잭 콘래드가 나누는 대화는 그 세상의 많은 것을 축약합니다. 스타가 된 이상, 스타가 된 나는 내가 맞지만 내가 아니기도 합니다. 나는 시간이 지나 스러지더라도 스타였던 나는 그 화면, 그 캐릭터, 그 시간에 남아 영원한 생명력을 누리게 됩니다. 나의 마지막은 누군가의 시작이 되고, 그 순간과 과정 또한 영원히 반복되어 이 거대한 세상의 동력이 됩니다.



 정말 모든 순간은 영화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했던 그 많은 일들이 그대로 영화가 되어 또 다른 누군가를 있게 할 수 있습니다. 불 꺼진 커다란 방에 모인 사람들이 동시에 바라보는 그 커다란 스크린 속 일들은 결코 가짜가 아닙니다. 그를 보고 조금이라도 달라질 누군가가 있다면 그의 생명력은 계속됩니다. 그렇기에 영화는 영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감독이 자신의 사랑을 아낌없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표현하는 작품입니다. 매니의 눈과 감정을 빌려 영화적 순간들에 찬사를 보냅니다. 술에 취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사람이 감독의 신호가 떨어지는 순간 영화사에 남을 위대한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컷 신호가 떨어지는 순간 그 영원한 위대함을 직감하고 하나되어 환호합니다.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가 도입된 격변의 1920년대 세트장의 에피소드도 독특한 볼거리입니다. 배우들은 대사를 암기할 필요도, 목소리가 좋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야외 촬영장에선 수많은 장면들이 요란한 시장 한복판처럼 동시에 촬영되었습니다. 스튜디오 촬영과 오디오 장비의 도입은 존재했던 세상의 멸망이자 새로운 세상의 개막이었고, 직전까지 버티고 서 있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렸죠.


 메시지와 의의를 따지지 않더라도 인물의 일대기 또한 충실하게 구성했습니다. 초반부 화려한 파티에서 시작된 매니와 넬리의 관계는 데이미언 셔젤과 항상 함께했던 음악감독 저스틴 허위츠의 선율 덕에 <라라랜드>의 향기를 풍기죠. 우정, 연민, 동경, 사랑이 뒤섞인 이들의 감정선은 로맨스로도, 스타로 태어난 사람과 스타가 아닌 사람의 상호작용으로도 3시간을 너끈히 이어갑니다.


 하나의 이야기에 다양한 인물들의 순간이 아닌 인생사 전체가 뒤엉켜 있지만, 누구 하나 뒷전으로 빠지지 않습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누린 사람들과 누리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놓입니다. 너와 내가 모여 우리가 되는 차원에 시간이라는 축을 추가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이야기는 그를 봤던, 보고 있는, 볼 이야기를 만들어 모든 순간을 완성합니다.



 영화라는 매체의 의미를 단 한 번이라도 곱씹어 본 사람이라면 벅찰 수밖에 없는 대사와 생각들의 총체입니다. 인류 최초의 활동 사진과 <열차의 도착>부터 영화사의 순간들을 필름의 현상과 함께 하나씩 훑는 최후반부 몽타주는 한 켜씩 모은 열광의 대단원이죠. 방금 전까지 박수를 보낸 단상에 스스로 올라갈 대담함과 배짱을 지닌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담대한 마무리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