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인형놀이
에른스트 호프만의 고전 <호두까기 인형>을 각색하여 <길버트 그레이프>의 라세 할스트롬이 메가폰을 잡은 <호두까기 인형과 4개의 왕국>입니다. 2016년 초부터 약 10개월 정도 촬영을 진행했으나, 디즈니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2017년 말에 재촬영을 진행했죠. 특이하게도 재촬영은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져>의 조 존스턴이 지휘했고, 그렇게 영화는 두 감독의 공동 작업물로 귀결되었습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꼬맹이가 정말 잘 컸다는 기사만 몇 년째 보고 있는 매켄지 포이를 필두로 키이라 나이틀리, 모건 프리먼, 헬렌 미렌이 함께합니다. 특이하게도 영화 내내 등장하는 호두까기 인형 역의 신인 제이든 포오라-나잇은 포스터 명단에 빠졌고(영화 제목이 <'호두까기 인형과' 4개의 왕국>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중반부 발레 공연 장면에 잠깐 등장하는 미스티 코플랜드가 이름을 올렸네요.
크리스마스 이브, 대부 드로셀마이어의 파티에 참석한 클라라는 돌아가신 엄마의 마지막 크리스마스 선물을 열어줄 황금 열쇠를 찾아나섭니다. 대부에게 건네받은 황금실을 따라 마법의 세상으로 들어간 클라라는 호두까기 병정과 함께 세 개의 왕국을 지나며 환상적인 모험을 하게 되죠. 하지만 엄마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얻기 위해서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네 번째 왕국으로 향해야만 합니다.
언제부턴가 판타지 영화들의 경우 견적(?)만 보고서도 영화의 만듦새와 흥망을 예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액션이나 SF 등 일반적인 대작들은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깜짝 흥행이 종종 나오곤 하지만, 왜인지 판타지만큼 정직한 결과를 내놓는 바닥이 없네요. 이번 <호두까기 인형과 4개의 왕국> 역시 슬픈 촉이 먼저 온 영화였습니다(예정작들 중엔 <모털 엔진>이 또 유력합니다).
한마디로 기승전결이랄 것이 없습니다. 20쪽짜리 그림책으로 읽으면 딱 알맞을 줄거리가 스케일만 키웠습니다. 한없이 기초적이고 단순한 소재의 나열이 세상에서 가장 신비롭고 아름다운 동화로 포장됩니다. 디즈니 실사 영화들은 20세기에 제작된 애니메이션들을 토대로 원작의 감성을 영 좋지 못한 쪽으로 각색해 왔는데, <4개의 왕국>은 본보기로 삼을 애니메이션이 없어서인지 그저 맨 땅에서 허우적댑니다.
러닝타임 내내 오로지 시각적 요소에 올인합니다. 주인공을 비롯한 모든 캐릭터에게 장면별로 다른 옷을 입히는 데에만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인형놀이 세트를 잔뜩 사서 신이 난 것만 같습니다. CG 덕택에 하게 되는 비현실적 눈요기도 잠깐이면 피곤한데, 형형색색 의상과 분장의 유통기한은 더욱 짧습니다. 스틸사진과 컨셉아트를 잔뜩 늘어놓고 그래도 디즈니가 미술은 참 잘 한다는 씁쓸한 소회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주인공 클라라는 디즈니 여주인공의 긍정적인 공통점을 기계적으로 몰아넣은 집합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덕체를 고루 갖추고 어떠한 위기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으며 인간애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이미 출발 시점에서부터 완벽합니다. 관객이 무엇인가 부족한 주인공에게 자신을 이입하며 함께 극복하고 성장하는 과정이 통째로 빠져 있습니다. 뭣도 모르지만 혼자서 하고 싶은 대로 하다 보면 운명과 우연이 겹쳐 알아서 영웅이 됩니다. 유품 덕에 하게 되는 클라라의 깨달음은 그 자체로나 전개 방식으로나 근래 디즈니 영화 중 최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쩌면 디즈니가 계속되는 실사 영화들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똑같이 엉성해도 어떤 영화는 10억 달러를 우습게 넘보고, 어떤 영화는 제작비 회수도 못 할 지경으로 무너져내리길 반복하고 있는 탓이죠. 그동안 확실해진 것이 딱 하나가 있다면, 누가 어떻게 만들든 고전 애니메이션을 옮겨 놓기만 하면 대박이 터진다는 겁니다. 어찌됐든 <덤보>, <알라딘>, <뮬란>, <라이온 킹>이 기다리고 있으니 디즈니 입장에서는 싱글벙글할 일만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