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멸의 기관 그 자체
피터 잭슨. <반지의 제왕>을 내놓은 그 이름은 판타지 장르의 신이 된 지 오래입니다. 대부분의 판타지 영화들은 원작으로 두고 있는 인기 시리즈가 있고, 그래도 영화화될 정도의 인기가 있으니 주목을 받았겠지요. 팬들이라면 정말로 <반지의 제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라고 생각할지 모르구요. 그렇게 <반지의 제왕>과 피터 잭슨은 판타지 신작들이 수없이 즐겨 찾는 맛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털 엔진>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갔습니다. 천하의 피터 잭슨이 제작자로 직접 참여한 것이죠. 피터 잭슨의 이름은 필립 리브의 동명 소설 시리즈를 원작으로 두고, 휴고 위빙이나 헤라 힐마, 로버트 시한이 출연했다는 사실보다 훨씬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하지만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트랜스포머> 5부작은 스티븐 스필버그를, 대부분의 DC 유니버스 영화는 크리스토퍼 놀란을 제작자 명단에 올린 영화였습니다.
인류가 저지른 '60분 전쟁'으로 오염되어 더 이상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린 지구. 전 세계의 도시들은 각자만의 방식으로 이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도시 간에도 약육강식의 법칙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견인 도시 런던은 호시탐탐 다른 도시들을 노립니다. 본의 아니게 여정을 함께하게 된 헤스터와 톰은 야욕을 뻗치는 런던의 지도자 발렌타인에 맞설 유일한 희망입니다.
판타지나 SF 영화들은 종종 한 문장만으로 관객을 불러모으는 힘을 발산합니다. <퍼시픽 림>은 빌딩만한 괴수와 로봇이 싸우는 광경을 예고했고, 영화 내내 거기에 충실했습니다. <모털 엔진>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시가 도시를 사냥한다'. 엄청난 상상력과 기대를 뿜어내는 문장이죠. 그리고 장대한 오프닝으로 그 기대에 보답합니다. 산처럼 거대한, 바퀴가 달린 대도시가 평야를 질주하며 거대한 작살로 작은 도시를 노리는 장면은 큰 스크린의 값어치를 해냅니다.
메가폰을 잡은 크리스찬 리버스 감독은 <모털 엔진>이 장편 데뷔작입니다. 신인임에도 1억 달러짜리 프로젝트와 피터 잭슨을 손에 넣었습니다. <반지의 제왕>과 <호빗> 시리즈의 시각효과를 담당한 경력 덕입니다. 실제로 빛 가득한 화면의 질감은 <호빗> 시리즈의 풍광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시대만 살짝 다를 뿐, 평야를 달리는 도시 옆에 갑자기 용 스마우그가 날아다녀도 아주 어색하지만은 않을 듯 합니다.
이처럼 <모털 엔진>은 볼거리에, 비주얼에 승부수를 건 영화입니다. 컨셉 아트만 구경해도 상상력을 키울 수 있을 것 같은 장면과 설정들이 이어집니다. 과거와 미래의 기술이 합쳐져 증기 기관으로 로켓도 쏘아올릴 수 있을 법한 스팀펑크의 향연입니다. 땅으로만 다니는 도시, 바다 위를 걷는 도시, 공중에 떠 있는 도시로 육해공을 채우죠. 보고만 있어도 미술 팀과 CG 팀이 고생했을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여느 판타지 영화들이 그렇듯 <모털 엔진> 역시 시리즈를 지향합니다. 그렇다면 1편은 거대한 세계관의 초석을 닦아야 하고, 기반이 되는 여러 설정들을 처음으로 꺼내놓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거기서부터 삐걱댑니다. 도시가 도시를 사냥하는 거대한 아귀만 그럴듯할 뿐, 그것들을 맞물려 돌아가게 할 작은 이빨들은 그야말로 제멋대로 돋아 있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각본의 설득력을 훨씬 앞섭니다. 그러면서 생긴 틈은 세계관을 헐겁게 합니다. 사냥을 하는 도시와 사냥을 당하는 도시가 분화된 역사적 배경은 세계관의 핵심이어야 맞으나 안내 자막으로 대체됩니다. 세계관 속 장치들은 정말 그만큼의 시간을 가지고 발전한 것이 아닌, 하루아침에 책을 펼쳐서 하늘에서 떨어진 것만큼 엉성합니다.
극중 2100년대가 천 년도 더 된 때라는 언급이 나오니, <모털 엔진>의 배경은 최소한 3100년대 이상입니다. 제아무리 어마어마한 전쟁으로 땅이 황폐화되었다 한들 기술의 수준부터 엉뚱합니다. 도시를 움직일 기술은 있으나 총을 양산할 기술은 없습니다. TV는 만들 수 있으나 CCTV는 만들 수 없습니다. 양자 에너지를 활용하면서 휴대폰은 그림의 떡입니다. 이쯤 되면 먼 미래가 아니라 가상의 세계를 상정했어야 맞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육해공 도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상 도시는 곧 부러질 것 같은 다리로 버티고 있고, 공중 도시는 충격적이게도 열기구(!)에 매달려 있습니다. 큰 화면에 넓게 담은 그림만 멋질 뿐, 견인 도시와 사냥꾼들이 널린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남았다는 설명은 불가능합니다. 심지어 영화마저 그 우스갯소리를 받아들이듯 도시씩이나 되는 소재를 일종의 상황별 소모품으로 사용합니다. 스스로의 무게감을 쉬지 않고 깎아내립니다.
그렇게 비어 가는 자리엔 또 이국적인,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소재들을 가져다 놓습니다. 스커틀버트, 사우시, 라자루스 여단 등 지어낸 고유명사들을 마구 꺼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딱 한 번 언급되고, 딱 한 번 등장한다는 것이죠. 눈속임으로 순간적인 관심을 끌어낸 뒤 곧바로 효용을 다합니다. 세계관의 깊이를 더하는 작업이 너무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옆으로 넓어지기만 합니다.
캐릭터로 넘어가도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회상으로 전개되는 헤스터의 과거사는 크게 두 개의 가지로 갈립니다. 하나는 우연히 선택을 받았다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흔한 설정입니다. 그런데 다른 하나는 발렌타인과의 대립을 다룬 영화의 큰 줄기와 영 따로 놉니다. 왜 무턱대고 도망을 치는지, 왜 무턱대고 다 부수면서 쫓아오기만 하는지 시원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일단 벌여 놓고 수습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렇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여야 하죠.
톰은 평범한 소년의 신분으로 도시의 절대 권력자조차 해내지 못한 희귀품 수집을 일찌감치 해냅니다. 사실 그것들을 혼자서도 잘 모아 놨다는 설정만 없으면 아예 존재 이유를 잃어버릴 정도로 가벼운 인물입니다. 발렌타인은 전형적인 판타지 영화 악당이라고 하기에도 목적과 수단이 상당히 불분명하구요. 목표하던 방패 벽만 부순 이후 곧바로 점령당해 무너진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크고 작은 구멍이 숭숭 뚫린 세계관을 무대로 개성과 개연성 모두를 갖추지 못한 캐릭터들이 벌이는 사건들이 이어집니다. 재료가 물렁하니 결과가 탄탄할 리가 없습니다. 여기저기 때리고 부숴도 등장인물들의 동기와 행동에 물음표가 더해질 뿐이죠. 이어지는 모든 장면들엔 훨씬 훌륭하고 간단한 대안이, 혹은 애초에 그러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가 존재합니다. 허술하고 빈약함이 끝이 없습니다.
도시가 도시를 사냥하는 광경은 예고편 분량이 곧 오프닝의 분량이고, 오프닝 분량은 곧 영화 전체의 분량입니다. 1억 달러의 제작비는 판타지 세계관을 뒷받침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주인공 배우 헤라 힐마와 로버트 시한은 카라 델레바인과 저스틴 롱의 저예산 선택지가 아닌가 싶습니다(그에 더해 슈라이크는 실제 배우인 스티븐 랭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훨씬 닮은 것 같습니다).
생각 없이 보려고 노력하는 관객에게 어쩔 수 없이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만듭니다. 몇 개 되지 않는 장점 중 가장 분명한 장점입니다. 한 번 시작된 생각은, 한 번 싹트기 시작한 회의감은 캐릭터와 세계관으로 옮기고 번져 결국엔 영화를 통째로 무너뜨립니다. 기준을 낮추고 또 낮춰도 더 낮은 곳에서 더 내려오라고 바라봅니다. 그렇게 <모털 엔진>은 자기 손으로 직접 꺼내든 어떤 것의 뒷감당도 하지 못합니다.
IGN 리뷰 링크: https://goo.gl/HgBQ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