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몸 건사하려 마구잡이
본국 덴마크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안데르스 월터 감독의 할리우드 데뷔작, <아이 킬 자이언츠>입니다. 조 켈리와 켄 니무라의 동명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했고, 해리 포터 시리즈 중 <마법사의 돌>과 <비밀의 방>을 감독한 크리스 콜롬버스가 제작자로 나섰죠. 2002년생 신예 매디슨 울프를 주인공으로 조 살다나, 이모겐 푸츠, 제니퍼 엘 등이 출연합니다. 당초 1월 말 개봉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2차 시장으로 직행하고 말았죠.
따분한 학교와 위태로운 가정에서 탈출하고 싶은 바바라에겐 한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덩치의 거인들을 찾아내 죽이는 사냥꾼이 바로 그것이죠. 누구도 그들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바바라는 자신의 임무를 다하려 묵묵히 매일 요새를 짓고 보초를 섭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혼자였던 바바라에게 영국에서 전학 온 소녀 소피아가 말을 걸죠. 바바라는 소피아에게 그동안 숨겨 왔던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고, 거인들의 위협 역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집니다.
아이들의 유년 시절 트라우마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판타지 세계의 무언가로 번져나간 영화는 많았습니다. 현실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한 나머지 환상의 세계를 자신만의 출구로 삼는 것이죠. 깜찍하게는 <비밀의 숲 테라비시아>부터 무겁게는 <몬스터 콜>도 있었습니다. 보통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혹은 두려워한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무언가가 무시무시한 외양의 괴물로 등장하곤 합니다.
<아이 킬 자이언츠>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객들은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주인공 바바라에게 모종의 사연이 있음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마을을 습격해 모든 것을 부수겠다는 거인들은 바바라의 기억 속 무언가를 상징하고 있으며, 바바라는 거인들과 맞서는 과정 자체에 집중합니다. 항상 그들과 맞설 준비를 하고 예방책을 세웁니다. 그렇게 거인은 물론 자신이 봉인한 기억과도 멀어지려 하죠.
전설의 무기를 지니고 다니고 직접 만든 덫을 곳곳에 설치하는 등 만반으로 대비하지만, 막상 거인들이 나타나는 순간엔 어떤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한 번 무너진 내면은 점점 깊은 수렁으로 떨어집니다. 그런 그녀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도 있지만, 바바라의 눈에는 거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그들이 더욱 이상할 뿐입니다. 그렇게 마음의 벽은 점점 높아져만 갑니다.
<아이 킬 자이언츠>는 동종 영화들의 흔한 심리 구성을 바탕으로 바바라라는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당연히 바바라는 영화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관객들은 바바라의 감정선을 아주 세밀한 지점까지 따라가며 공감을 이루어야 하죠. 그러려면 영화는 관객들의 시선이 위치할 지점도 나서서 정해 주어야 합니다. 보통은 그런 주인공 옆의 관찰자를 딱 한 명 두거나 아예 두지 않죠. 주인공에게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아이 킬 자이언츠>는 지나치게 많은 조연들을 투입시키며 초점을 분산시킵니다. 시드니 웨이드의 소피아, 조 살다나의 몰리, 이모겐 푸츠의 카렌까지, 바바라를 바로 옆에서 챙기는 인물들만 해도 세 명이 나오죠. 등장은 시켰으니 이들의 이야기 또한 외따로 들려주어야 할 뿐더러, 서로와의 연결점은 없기에 결국 같은 유형의 인간관계 흐름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보아야 합니다.
게다가 바바라의 트라우마는 마음의 벽을 닫는 것을 넘어 그를 건드리는 사람들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단계까지 나아갑니다. 그리고는 '당돌하게 거인과 맞서는 깜찍한 소녀' 이미지를 씌워 판단력을 흐립니다. 조금만 따져 보아도 단순 폭력부터 중범죄를 넘나듭니다. 상상력이 조금만 어긋났다면, 바바라가 손을 뻗칠 수 있는 재료들이 조금만 다양했다면 개인적 성장의 제물로 무엇이 얼마나 희생되었을지 알 수 없습니다.
너무나 다른 것을 약속하는 포스터를 포함, 굳이 판타지라는 장르를 선택해 시각적으로 재현까지 해낸 이유마저 찾을 수 없습니다. 거인이 직접 등장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완성할 수 있는 이야기였고, 반대로 거인을 보여주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이토록 산만한 구성을 채택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판타지와 드라마, 한 명의 주연과 여러 명의 조연, 바깥 세상과 내면 등 어떤 갈림길에서도 확실한 방향을 잡지 못하며 길을 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