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평범한 세상
어떻게 하면 쉽고 안전하며 꾸준하기까지 한 수익을 올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디즈니가 21세기의 기술력을 만났습니다. 2D로 그려서 표현할 수 밖에 없었던 모든 것을 실사로 구현할 수 있게 된 지금, 고전과 명작의 반열에 오른 20세기의 애니메이션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죠. 첫 삽이었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초대박을 터뜨렸고, 찔끔찔끔 진행되던 프로젝트들은 1년에 세 편씩 선을 보이기에 이르렀습니다.
머나먼 사막, 신비로운 왕국 아그라바. 좀도둑으로 살고 있지만 심성만은 착한 청년 알라딘은 왕궁 실세 자파의 의뢰로 마법 램프를 찾아 나서고, 미지의 동굴에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를 만납니다. 한눈에 반한 자스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알라딘은 지니의 능력으로 왕자가 되려 하지만, 여전히 램프를 노리는 자파와 일당들은 잠시도 그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먼저 개봉된 <덤보>가 평가와 흥행 모두 의외의 부진을 면치 못한 탓에, 뒤따르는 <알라딘> 역시 급작스러운 부담을 안아야 했습니다. 마블 스튜디오의 솔로 영화들에서 드러났듯, 디즈니는 감독의 영향력을 평준화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죠. 개성 넘치는 화면과 대사빨을 자랑하는 가이 리치가 메가폰을 잡았음에도 전체 관람가용 <알라딘>이 그를 허락할 여지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가이 리치에겐 물 빠진 색감을 기본으로 부리는 특징적 재주가 몇 가지 있습니다. 대부분은 몸과 몸이 부대끼는 추격전을 찍을 때 두드러지죠. 배우에게 카메라 시점을 고정하는 수법(위 영상)과 순간적으로 들어가는 슬로모션(아래 GIF)이 대표적입니다. 둘 다 전개와는 무관하게 화면 자체의 몰입감을 끌어올리죠. 총천연색으로 무장한 <알라딘>의 색감을 빼기는 어려웠지만, 가이 리치라는 이름을 확인할 기회는 얼핏얼핏 있었습니다.
기본적인 기승전결은 92년도 원작 애니메이션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자파의 사주로 우연히 램프를 찾은 알라딘이 지니와 함께 모험에 나서죠. 어쩌다 함께하게 된 자스민은 자신의 능력과 존재감을 모두에게 인정받아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를 마치구요. 뮤지컬 형식까지 재현되어 원작 명곡들의 따끈따끈한 리메이크도 즐길 수 있습니다. 귀 호강이 보장된 곡들의 치트키 기능(?)은 부정할 수 없었네요.
전체 관람가용 판타지 어드벤처의 안전한 길을 안전하게 따라갑니다. 왕국을 차지하고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악당의 어설픈 음모도 사랑스러운 수준입니다. 쳐다보게만 하면 사람의 의식을 조종할 수 있는 지팡이(사실상 인피니티 스톤이 들어 있던 로키의 창보다 강력합니다)를 갖고서도 진땀을 뺍니다. 그래도 목적은 분명하지만 계획은 모자란 친구라고 생각하며 너그럽게 볼 수 있습니다.
실사만의 흡인력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양탄자를 타고 날아다니는 장면과 4D의 조합은 꽤 훌륭합니다. 화면 시점을 따라 움직이는 좌석에서 바람을 맞고 있으면 몰입감이 대단하죠. 장르를 구분할 만큼의 액션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의외로 등을 툭툭 치거나 볼에 바람을 뿜어 깜짝깜짝 놀라는 순간도 많습니다. 결정적으로, 몇 장면을 그냥 넘어가며 방심을 시키다가 딱 한 번 세차게 뿜어낸 물에 세수(...)를 하면 감회가 남다릅니다.
거기에 분위기와 재미의 8할을 책임지는 윌 스미스의 지니가 있습니다. 끔찍한 CG 탓에 티저 예고편 공개 당시 전 세계 팬들을 당혹케 했던 첫인상을 뒤로한 채 원작 못지않은 존재감을 뽐내죠. 이제는 범접할 수 없어진 로빈 윌리엄스의 지니와 직접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매력과 스타일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미 상까지 탔던 짬은 어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반면 영화 쪽에서는 상대적으로 신인인 알라딘 역의 메나 마수드와 자스민 역의 나오미 스콧은 배우와 캐릭터 모두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둘 다 연기보다는 춤 실력(?)과 음색으로 배역을 따낸 것처럼 보이죠. 악당 인기투표까지 진행할 수 있을 디즈니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아성을 생각하면 무색무취의 실사판 자파가 더욱 아쉬워지긴 하지만, 알라딘과 자스민의 허전함에는 비할 수가 없습니다.
알라딘과 지니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초중반부는 급작스레 자스민으로 옮겨 가는 후반부의 전개와 영 아귀가 맞지 않습니다. 전자는 지니의 힘으로 왕자 자격을 얻어낸 알라딘을 통해 외면의 그럴싸함보다는 내면의 진정성을 강조하죠. 응당 러닝타임 내내 영화를 지탱하는 줄기여야 했지만, 자스민의 독주와 함께 순식간에 자리를 잃어버립니다. 결국 둘 중 어느 것도 중심을 차지하지 못한 채 과정과 결과가 따로 노는 꼴이 됩니다.
2019년판에 새로 등장한 자스민의 곡 'Speechless'는 곡의 완성도 면에서는 흠잡을 곳이 없지만, 기존 곡들과의 이질감이나 삽입되는 장면의 어색함까지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른 곡들이 영화의 전개와 하늘하늘하게 어우러진 것과 달리, 홀로 뮤직 비디오를 틀어놓은 듯 한껏 과장되어 있죠. 잠재력만 놓고 보면 <겨울왕국>의 'Let It Go' 이상이었기에 더욱 아쉬운 조합입니다.
알라딘과 지니의 갈등이 튀어나오는 중반부 시점부터 영화 전반에 걸친 단점들이 한 곳에 쏟아집니다. 원작과 노래의 마법력이 다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요. 계획도 없이 정복만 부르짖는 자파도 슬슬 피곤해지고, 2D판의 감초 3인방(양탄자, 아부, 이아고)을 거의 도구 취급하는 각본도 원망스럽습니다. 화폐 개념에도 무지한 지도자와 일반 상인의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의적 등 돌아보면 갸우뚱한 곳도 더러 있습니다.
의도한 바대로 가족 단위 관객들에겐 일말의 진입 장벽도 세워 놓지 않은 모범작입니다. 무난하게 즐기기엔 충분하고, 시대에 발맞추려는 노력도 엿보입니다. 그러나 변화가 꼭 진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둘 것은 두고 뜯어고칠 것은 손도 보았지만, 원작 애니메이션과의 비교에서 상위 호환을 가져갈 지점이(=실사판을 만들어야만 했던 돈 외의 이유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