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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리뷰

종의 기원과 종의 기원

by 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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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


몇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신작 주기 탓에 언제 풀릴지 모를 정보 한 줄 한 줄을 목놓아 기다리는 감독들이 있습니다. 몇 주 전 <Tenet>을 발표한 크리스토퍼 놀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로 돌아온 쿠엔틴 타란티노에 이어 봉준호도 이름을 올리긴 충분하죠. 당초 <데칼코마니>라는 제목으로 기획되어 영제 <패러사이트>라 알려지기도 했던 <기생충>이 그 주인공이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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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백수로 살 길은 막막하지만 사이는 좋은 기택네 가족. 장남 기우의 명문대생 친구가 소개해 준 고액 과외 자리는 모처럼 싹튼 고정 수입의 희망입니다. 기우는 온 가족의 도움과 기대 속에 박사장의 저택에 도착하고, 젊고 아름다운 사모님 연교가 그를 맞이합니다. 수업을 시작하며 집 안을 유심히 살피던 기우는 왜인지 모를 강렬한 가능성을 포착하고, 그렇게 가족과 가족의 돌이킬 수 없는 만남이 시작됩니다.


영화의 시작과 함게 칸 영화제 로고가 떠오르고, '황금종려상 수상작' 타이틀이 앞에 붙습니다. 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져나옵니다. 해외 영화제의 최고 상을 받은 영화를 한글자막 없이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영화를 목놓아 기다리는 해외 팬들보다 몇 달은 먼저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발전이자 축복입니다. <설국열차> 때 받아 놓은 봉준호 감독님 싸인을 괜시리 흐뭇하게 한 번 꺼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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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은 두 가족을 나란히 놓았을 때 자연스레 관찰하게 되는 차이를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으로 잡습니다. 반지하에 살면서 술에 취해 볼일을 보는 창 밖의 사람에게 소리도 지르지 못하는 가족이 있고, 저택에 살면서 밖의 어느 것에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가족이 있습니다. 안과 밖으로 품는 똑같은 의도와 똑같은 자극에도 결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위와 아래의 계급 구조를 다룬 영화임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반지하는 아래쪽에, 저택은 위쪽에 있습니다. 술을 마시고 싶을 때 한 쪽은 캔맥주를, 다른 한 쪽은 와인을 마십니다. 하늘에서 비가 억수로 쏟아질 때 한 쪽은 보금자리를 잃고, 다른 한 쪽은 하루 기분 낸 캠핑이 취소됩니다. 한 쪽은 선물을 받아도 먹을 것이 아니면 실망하고, 다른 한 쪽은 성대한 파티를 열면서도 빈 손으로 오라고 당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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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화가 취하는 태도입니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자신들이 가진 부와 명예를 당연한 것으로, 정당한 노력의 결과로 생각하는 부자들에게 그리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모자란 주인공을 내세워 일종의 선악 구도를 만들어냅니다. 사다리의 위쪽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인 것은 사실이고, 스스로가 그런 대중의 무의식을 대변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기생충>은 대범하게도 이를 자연적이고도 당연한 법칙으로 묘사합니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역류하는 물은 더럽습니다. 아래에서는 위를 바라보지만, 위에서는 아래를 신경쓰지 않습니다. 무언가 악의를 가지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종종 마주치는 순간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당황합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아래는 그런 사실에 더욱 분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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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영화에서도 직접적으로 묘사됩니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위를 동경합니다. 지금 손 안에 있는 것보다 더욱 좋은 것을 얻으려 분투합니다. 계단을 걸어올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제아무리 시간이 지나서 이제는 누가 끌어올려 줘도 안 가겠다 싶어도, 막상 문이 열리면 발은 저절로 위를 향합니다. 상승은 본능입니다. 그저 그를 가능케 할 수단이 한정되어 있을 뿐입니다.


위와 아래는 각자의 가속력으로 질주합니다. 아래에서는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를 좇아 달리지만, 위는 그저 즐겁게 앞을 향합니다. 올라가겠다는 사람끼리 뒤엉켜 싸우는 중에도 그런 싸움의, 혹은 싸움의 공간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습니다. 지나가는 시간은 바뀌는 세대가 되어 이 법칙을 더욱 공고히 합니다. 유일하게 모스 부호를 알아듣나 싶었던 아이는 이제 자신을 보호할, 누구보다 단단한 방어 기제로 무장할 것입니다. 작은 것은 커지고, 우연은 필연이 되고, 후천은 선천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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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결핍과 정신적 결핍은 서로가 서로를 낳는 악순환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일부가 되어 나를 정의하고 드러내 보입니다. 영화 내내 언급되는 '계획'은 이를 대놓고 드러냅니다. 그저 공부를 해서 연세대학교를 가고 그저 돈을 벌어서 저택을 사겠다는 계획은 계획이 아닙니다. 계획이라고 할 수 없는 계획입니다. 하지만 기우네 가족이 사는 세계에서는 너무나도 위대한 도약입니다. 사다리라면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생충이라는 종의 정의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결핍의 악순환은 사고의 근본적인 크기를 보잘것없는 나락으로 끌어내립니다. 이것의 가장 무서운 특징은 누군가 그를 알아보고 지적할 때까지 변화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런 지적과 깨달음이 발생했을 때의 부끄러움과 분노는 지나간 시간을 한 번에 모아 폭발합니다. 영화는 여기에 어떤 가치와 판단도 더하지 않은 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이 현실인 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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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전혀 다른 두 가족을 보여주며 마치 인간은 두 종류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관객들이 자신을 투영할 답안은 정해져 있습니다. 누구나 가진 것을 외면한 채 가지지 못한 것을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이 화려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세상에 티나지 않게 어울리고픈, 막연한 기대와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기생충>은 이 감각에 익숙해진 코에 새삼스러운 냄새를 들이밉니다. 그러면서도 꿋꿋이 유지하는 무표정은 감상의 뒤편을 후비는 또 다른 감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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