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여름, 친구들과 서울대로 파쿠르를 하러 갔다. 대학교 동기이자 마술을 업으로 하는 친구 정현진(이 친구도 나와같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먹고산다는 점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었다. 인플루언서 ‘쇼갱’으로 유명하다), 독일 친구 율리우스(Julius Hub)와 한국계 덴마크인 효(Hyo), 그리고 하자작업장학교 파쿠르 수업에서 만난 이민규와 함께 했다.
유명한 '샤' 정문 앞에 도착했다. 뉴스에서만 보던 정문인데 가까이서 보니 누구나 쉽게 올라갈 수 있게 사다리도 있고, 기울기가 완만하여 좋은 도전으로 여겨졌다. 율리우스와 효 또한 정문 모양이 신기하게 생겨서 정문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안전점검을 했다. 바로 옆에 경비실도 있어서 들키지 않게 재빨리 정문 정상까지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대 정문이 특정 상징물이라기 보다는 재미있는 놀이터로 여겨졌다.
나는 재빨리 정문 오르막에 올라타 철제 사다리를 따라 네발걷기로 빠르게 정상을 향해 나아갔다. 높이가 점점 높아짐에 따라 손과 발을 내딛는 틈 사이로 낭떠러지가 보였다. 정문의 높이는 모두에게 적절한 두려움을 제공했고, 역설적이게도 두려움이 있기에 재미와 즐거움, 자기성장의 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꼭대기에 올라섰고, 뒤이어 율리우스, 효, 민규도 정상에 합류했다. 우리는 들뜬 마음에 관악산과 서울대 캠퍼스 전경을 내려다보며 경치를 감상했다. 현진이가 저 멀리서 카메라로 정문에 올라선 우리를 영상으로 담았다.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서둘러 정문을 재빠르게 내려왔다.
정문 옆에 있는 서울대 미술관 건물 앞에 도착했다. 넓은 광장에는 대리석으로 된 의자들이 정렬되어 있었고 시민들이 앉아서 쉬고 있었다. 평소 파쿠르 수련자들은 도시공간의 벤치를 준비운동 혹은 점프 연습의 도구로 활용한다. 친구들과 함께 습관적으로 돌 의자 사이를 점프하고, 돌 위에 앞꿈치로 정확하게 균형잡아 착지하는 프리시전 점프를 연습했다. 산책 나온 몇몇 아이들과 어른들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우리를 관찰했다.
어느정도 체온이 오르자 광장 가운데에 있는 높은 기둥도 올라가보고 싶었다. 실내 클라이밍 센터에 가서 배웠던 '삼각점' 연습도 복습해볼 좋은 기회였다. 삼각점이란 벽에 팔힘을 최대한 아끼고, 몸의 가장 안정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자세로, 양쪽 다리 사이에 양쪽 손을 모아잡아 삼각점이라 이름이 붙은 기술이다.
기둥을 오르기 시작했다. 돌로된 기둥은 각 단층마다 손가락으로 잡을 수 있는 틈이 있었다. 생각보다 쉽게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다만 꼭대기층이 견고하지 않았고, 내 체중에 의해 흔들거리기까지 했다. 위험할 것으로 예상되어 다시 한단씩 발을 딛고 내려왔다.
기둥에 흥미를 잃은 나는 다시 돌의자로 가서 파쿠르의 연속점프 기술을 연습하기 좋게 의자를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효와 줄리우스도 신나서 돌의자들을 여러각도와 거리로 재배치했다. 의자와 의자사이를 신나게 점프하고 있을 때, 미술관쪽에서 나이가 지긋한 남성 두 명과 그 뒤로 젊은 여성 세 명이 급하게 오는 것이 보였다.
교수로 보이는 한 분이 고함을 쳤다. “여기서 뭐하는거야 임마!”
우리는 순진한 얼굴로 말했다. “파쿠르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리 중 한 분이 나서서 말했다. “지금 예술작품을 훼손하신 것 아세요? 이 돌은 공공예술 작품입니다.”
의자인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예술작품이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올림픽공원의 야외 작품들처럼 작품명, 작가명 등이 표기된 표지판이 있는 것만 예술작품인 줄 알았고, 주변 시민들 또한 작품위에 앉아 있어 의자인 줄 착각한 것이다. 서둘러 사과하고, 친구들과 함께 돌의자들을 원래 위치로 재배치했다. 다행히 작품이 원위치되고 나서 미술관 관계자들은 별다른 말없이 떠났다.
종합운동장으로 이동했다. 운동장에는 학생들이 열심히 축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테라스 난간에서 균형잡기도 하고, 조회대의 높은 벽을 월런(wall run) 기술과 다이노(Dyno) 기술로 올라가기도 했다.
율리우스는 키가 190cm를 훌쩍 넘겨서 높은 벽을 잘 올라갔다. 법대 앞 휴게공간에서는 효의 제안으로 친구들 등을 밟고 징검다리처럼 이동하여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도전을 했다. 효는 덴마크에서 배우로 활동하는데 서커스 교육도 받아서 상호간 협력을 통해 몸의 지지구조를 만드는데 능숙했다. 무거운 체중을 등이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그동안 파쿠르는 장애물과 나 자신과의 투쟁으로 이해됐었는데 이렇게 놀이를 통해 파쿠르를 경험하니 단체운동의 성격도 띄었다. 등 사이를 건너가다가 균형을 잃고 맨 땅을 밟을때면 우리는 서로 미친듯이 웃었다. 마무리 운동은 종합체육관 천장에 짐나스틱 링을 설치하여 머슬업(Muscle up) 훈련과 유연성 향상을 위한 스트레칭을 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날 촬영한 영상을 편집했다. 영상에 담긴 즐거운 기억들, 소중한 도전들을 나 혼자만 기억하기보다는 여러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기쁨을 같이 나누고 싶은 욕심이 컸다. 영상제목은 ‘서울대 파쿠르 답사 - 교수에게 쫓겨나다’로 정했다. 그날 새벽, 유튜브에 영상을 업로드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댓글들을 확인해 보니 서울대 학생들의 분노가 담긴 댓글들이 대부분이었다. 서울대 정문을 올라간 것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을 올라가고 옮긴 것, 그리고 캠퍼스 내에 외부인이 출입한 행동들은 학생들의 원성을 자아냈다. 더러는 서울대라는 학벌의 상징, 학교에 대한 자부심 앞에서 고개숙이지 못할 망정 예의없이 건조물을 올라가고 점프한 것에 대해 혐오발언들이 많았다. 이에대해 몇몇 네티즌들은 한국의 학벌사회를 비판하는 행위예술로 보는 댓글들도 있었다. 영상을 본 네티즌들의 다양한 자의적인 해석이 이어졌다.
저녁이 되자 조회수가 순식간에 5만을 넘어섰다. 댓글도 삼천개에 육박했다. 수 만명으로부터 욕을 먹는 것은 난생처음이었고 어느순간부터 나의 일상은 유튜브 댓글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이쯤되니 두려움과 불안이 머리 속을 지배했다.
영상을 삭제하여 논란을 잠재우고 책임을 회피해야 하나, 계속 그대로 두고보아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던 중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서울대 미술관 행정실장이었다. 결국 나는 서울대 미술관 관계자를 통해서 관장, 예술작가에게 구체적인 소명과 사과를 전했고, 그에 따른 금전적, 물질적 보상을 절차대로 마무리하였다. 또한 서울대 미술관 측의 요구대로 유튜브 영상을 삭제했다.
서울대 파쿠르 영상을 삭제하는 것은 버튼 하나만 누르면 이루어지는 간단한 일이었으나, 평온했던 일상의 ‘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음속에 ‘혼란’이 들어섰다. 마음 깊은 곳에서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 두려움은 내 자신을 방황하게 만들었다.
이 거대한 해일을 부딪혀가며 반대편으로 노를 저어나갈 힘과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혼자였다. 오랫동안 함께 파쿠르를 해왔던 동료들은 언제 그랬냐는듯 잠적했고, 항상 나의 활동을 응원해 왔던 동호회 회원들은 물만난 물고기처럼 신이나서 나에 대한 근거없는 소문과 이야기들을 만들었다.
어느순간 나는 파쿠르의 개척자에서 파쿠르 범죄자, 악마가 되었다. 모두가 인간 김지호로서 관계를 맺었다기보다는 김지호의 파쿠르, 명성, 능력, 권위에 기대어 관계를 맺어왔던 것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나의 실수를 용서거나 혹은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는, 하물며 불안한 마음을 함께 다독이며 감수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주변에 단 한명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을 때, 허무함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광기어린 듯 파쿠르에 더욱 깊이 파고든 이유는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사람은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 돌아서고, 떠날 수 있지만 파쿠르는 내가 존재하는 한, 영원처럼 항상 옆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바라캇 서울 전시회(바라캇 갤러리가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 개관한 전시 공간)에서 고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목재불상을 보았다. 이 불상은 당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고고학적 유물이다. 그러나 바라캇은 자신의 예술적 표현으로 이리저리 색칠해 버렸다. 고고학적 가치를 추구하는 자, 혹은 중국 정부에서 보면 이 행위는 완전한 유물 파괴 행위이다. 그러나 전시장에 있던 그 어떤 불상들보다도 새롭고, 살아있는 예술이었다.
그 불상은 존재자체만으로 정확하게 내 심장을 찔렀다. 자유로운 자기표현과 기존의 윤리, 도덕 사이의 딜레마에 빠진 내 자신을 순식간에 구원해 주었다. 어떠한 신, 국가, 민족, 법, 이념, 이상, 상징, 가치도 나에게 이보다 더 감동적이고 강력한 메시지를 줄 수 없다. 자유로운 예술은 어떤 것도 포용할 수 있고, 덧대어질 수 있으며, 사람들 각자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예술은 아무 말이 없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있을 뿐이다. 그것이 오히려 그 예술을 둘러싼 주변에 자유를 준다.
나는 불상처럼 있는 그대로, 가만히 있기로 결정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내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기로 결심했다. 어떤 목표, 결과, 뜻, 이상, 기준은 그것을 성취한 순간 거기서 끝나버린다. 결국 그런 목표 지향적인 것들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외부의 목표, 기준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여 살아있는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할 때 영원성, 무한함을 지닌다.
내가 ‘샤’ 사건에서 흔들렸던 원인은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유튜브’ 조회수라는 실체없는 명성에 욕심을 냈고, 사람들의 비난 앞에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명성에 욕심을 가지면, 반대로 명성에 누가 되는 일련의 사건들로부터 강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파쿠르를 시작하며 세상과 나는 늘 대립했다. 선생님들로부터 꾸중을 들었고, 학교 친구들로부터는 이상한, 독특한 친구로 보여지기 시작했다. 가족들에게도 알려지자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공부하라는, 잔소리도 듣게 되었다. 낮에는 올바른 학생, 밤에는 장애물을 넘는 일탈자로 살았다. 대학생이되자 드디어 낮에도 장애물을 넘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하늘의 법칙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무식하게 벤치에 발을 올리다니! 벤치는 앉는 곳이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앉을 때도 깨끗하지.”
"놀이터는 애들 노는 곳이에요. 나가세요. 사람은 나이 값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사람다니라고 만들어 놓은 길 놔두고 왜 벽을 올라갔어요? 내려오세요. 정해진 길대로 가야 안전하고 효율적입니다"
사물과 주변환경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감수성은 점점 예민해졌다. 나는 그렇게 그들의 교훈을 받으며, 장애물 넘기를 어떻게 해야 '착하고' '올바르고' '선하며' '깨끗한' 운동이 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올바른 파쿠르 발전과 보급을 하면,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 정한 사명에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꿈을 향해 달렸다. 사람들도 그의 올바른 꿈을 응원하고 지지해 주었다. 그러나 그가 '올바름'을 추구하면 할수록 장애물 넘기는 점점 더 자신이 그렇게 싫어했던 학교, 학원처럼 되어갔다. 그렇게 내 자신조차 '학교'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소중한 사람들이 떠나고 나서야 알게되었다. 그것이 아무리 올바른 '선' 일지라도, '모두'를 위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행하는 순간, 무한한 자유로움이 파괴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자유를 파괴한 '선'은 그 기준에 부합하면 상승하고, 부합하지 않으면 사회적 소외자를 생산해 낸다.
문명의 모든 사물, 도로, 길, 물건, 물질들이 각각의 역할과 용도가 정해져있고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져 질서와 조화를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기준, 규칙, 도덕, 종교, 윤리, 법, 상식, 이념, 목표, 상징이 개개인의 자유로움과 표현, 창의, 생동감, 활동성을 제한하고 파괴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서울대 사건은 고통스러운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예술로서 파쿠르의 정치적, 사회적 기능을 발견한 순간이기도 했다. 분명한 사실은 내가 파쿠르를 수련하면서 점점 다루는 문제의 크기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세상의 비난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물처럼 부드러운 내공을 쌓아 우리를 지배하는 상징들을 과감하게 깨부술 수 있는 파쿠르 작업을 해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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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는 무엇인가?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더불어 살아감에 있어서 암묵적으로 동의한 공동 선이다. 그러나 윤리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윤리는 절대적 기준, 진리가 없다. 시대, 지역, 사회,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현대 문명의 기초가 된, 가장 가까운 서구의 윤리 역사를 살펴보면, 근대시민사회를 연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토마스 홉스에 의하면 개인은 누구나 평등하며, 태어날때부터 자유, 행복, 생명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공동체 속에서 개인이 무한한 자유, 생명, 행복을 추구한다면 적자생존의 야생적 사회가 될 것이므로, 개인은 적절한 선에서 자신의 자유와 행복, 생명의 권리를 공공권력에 위임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개인의 권리와 공공권력 사이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 속에서 찾은 사회적 합의가 윤리인 것이다. 예를들어 유럽은 사적인 이익추구가 공동의 이익을 넘어서면 안 된다고 보았지만 미국의 건국이념이 담긴 독립선언서에는 공공의 이익보다 사적인 이익 추구가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본다.
근대시민사회 윤리의 문제점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므로, 하나의 기준으로 타자가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조건으로 출발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여러 심리학, 언어학, 철학, 진화생물학 등 여러 과학적 영역에서 밝혀졌듯이 인간은 타자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너와 나가 동일하다고 보는 것은 각자 자신이 매우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개인 입장에서 말도안되는 폭력인 것이다. 실제로 모두가 평등하다는 서구 중심적 사고방식은 다른 문화권, 인종을 계몽시켜 자신들의 근대성에 부합해야할 대상으로 보았다.
현대 사회에서는 적과의 동침,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요구한다. 현대사회에서는 나의 자유, 행복, 생명의 권리를 침해하는 타자가 있더라도 그 타자를 인정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요구받는다.
윤리는 유통기한이 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나타난 기준이 초기에는 제대로 작동하더라도,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상식, 이념, 절대적 진리로 따르는 순간 폭력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아무리 철저하고 완벽한 이론, 철학, 학문, 윤리가 있더라도 인류의 역사에서 한계를 드러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연은 순수를 싫어한다는 말처럼, 현대사회에 있어서 윤리는 어떤 기준도 세우지 않음으로써 시대변화에 유연하게 변화하는 윤리를 생산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어떤 절대적 윤리 기준이 없으니 내가 원하는대로 아무것이나 다 해도 된다는 윤리적 아나키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절대적 윤리적 기준이 없으니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파쿠르 수련자로서 지녀야할 윤리에 대한 사유이자 태도이다. 그렇다면, 옥상을 점프하고 싶어하는 나의 욕망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현대사회는 어떤 기준도 세우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양적으로, 질적으로 수많은 윤리적 기준들이 공존하고 있고, 서로 복잡하게 얽혀 구조화된다. 현대인은 그러한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검열, 자기반성적 삶을 살아간다. 이는 자신의 생명, 행복, 자유를 지나치게 타자에게 위임하는 삶이다.
나는 나의 자유와 행복, 생명을 추구할 자연적 권리와 공공 권력 사이에서 균형과 조화를 원한다. 그러므로, 자기검열로 가득찬 사회에서 자신의 권리를 추구하는 현장을 몸으로 직접 드러냄으로써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새로운 합의점을 도출하도록 요구하는 바다. 물론 이것 또한 어느 시점에서 유통기한이 다 되어, 공공권력이 필요한 시점이 대두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런 시점도 현재 없이는 오지 않는다. 나는 말한다. 개인의 권리를 공공권력에 양도해야할 시기가 온다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위해 목소리낼 것이다. 윤리의 역동적인 변화와 사회의 유연성은 개인의 권리와 공공권력 사이의 경계에 선 인간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