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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쿠르 코치 김지호 Oct 21. 2023

내가 몸에 남긴 파쿠르의 흔적

내 오른쪽 발 뒷꿈치는 왼쪽보다 혹처럼 튀어나온 뼈가 있다. 때는 2016년 국립현대무용단 <춤이말하다> 출연자로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본공연 직전 마지막 리허설 때였다. 첫 등장씬이 5m 높이의 음향기기 타워에서 무대바닥으로 점프낙법하는 안무였는데 마지막 리허설이다보니 긴장하고, 리허설을 본공연 보다 더 잘 해야 본공연은 쉽게할 수 있다는 생각에 5m 높이에서 조절해야할 점프를 욕심내서 더 멀리 뛰었다. 충격은 상당했고 착지를 제대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른쪽 발 뒷꿈치가 지면에 닿아 낙법하고 말았다. 뒷꿈치가 찌릿했고, 몇분이 지나자 심하게 퉁퉁 부어올랐다. 걸음을 디딜때 마다 심한 타박상처럼 통증이 느껴졌다. 30분 뒤 바로 본공연 시작이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파스와 진통제를 먹고 국립현대무용단에서 고용한 마사지사에게 마사지를 받는 것이 최선이었다. 고통으로 인해 '내가 본공연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본공연을 앞두고 그만둘 수 는 없었다. 나의 약속과 책임, 의지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둔 주말, 토월극장에는 관객들이 꽉 들어찼다. 나는 발목에 테이핑을 한 상태로 신발을 신고 음향타워 위에 올라섰다. 하얀 조명이 나를 비추자 망설임 없이 5m 아래로 또 한번 뛰어내려 낙법을 했고, 15분간의 멈춤없는 파쿠르 안무를 이어갔다. 발 뒷꿈치 통증이 착지할 때마다 느껴졌지만, 공연하는 동안 부상이 없는 것 처럼 모든 것을 통제했다. 나의 표정, 나의 걸음걸이, 움직임. 나는 초인의 의지로 고통을 이겨냈고, 본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함께 했던 파쿠르 동료들도 내가 뒷꿈치를 다친 줄 모를 정도로 나의 연기는 자연스러웠다.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를 뒤로하고 출연자 대기실로 돌아왔을 때, 내 오른발 뒷꿈치 통증이 더 심해졌고 눈살을 찌푸리며 짐과 가방을 추스렸다. 이날 이후 뒷꿈치 타박상이 완전히 회복까지 3개월이 소요됐고, 뒷꿈치 타박상은 족저근막염으로까지 확대되어 회복까지 총 10개월이 소요됐다. 


 나는 이 부상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내가 파쿠르를 하는 이유는 세계적인 파쿠르 선수가 되고싶어서가 아니라, 평생토록 오랫동안 파쿠르를 즐기고 건강한 움직임을 영위하기 위해서인데 공연, 촬영현장에 나가 몸을 쓰는 일은 몸을 위한 일이 아니라 몸을 소모시키는 일임을 알게 된 것이다. 무대 위에서는 안무가, 대회에 나가는 선수, 드라마와 영화 현장의 스턴트맨 등 몸을 상품 혹은 작품으로 소비하는 과정에 내가 꿈꾸는 비전은 없다. 이 경험으로 더더욱 코칭과 교육, 사업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가 됐다.   


<춤이말하다> 작품은 2015년에 국립현대무용단 안애순 단장님 섭외로 출연하게 됐다. 파쿠르가 처음으로 공연예술 분야로 진출한 계기였고, 무대라는 틀을 깬 작품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주인공이 되어 파쿠르라는 움직임의 예술을 대중들에게 ‘이야기’ 하고  ‘안무’를 선보이는 획기적인 작품이었다. 파쿠르가 무대와 객석 구분없이 종횡무진하며 역동적인 움직임을 선보이고, 드라마트루그의 도움 덕분에 나의 이야기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도록 매끄럽게 다듬어져 전달되었다. <춤이말하다>에는 발레, 한국무용, 현대무용, 파쿠르 4가지 분야가 등장하는데 이 중에서도 파쿠르가 단연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이 높았다. 덕분에 예술의전당의 시작으로 3년 동안 전국 각지의 예술회관을 중심으로 지방공연 투어를 다닐 수 있었다. 아래는 내가 춤이말하다 작품을 마치고 쓴 후기다.   


파쿠르(Parkour)는 본고장 프랑스에서 움직임의 예술(L'art du deplacement)로 불립니다. 국립현대무용단 [춤이말하다] 는 저에게 있어서 예술로서의 파쿠르를 배워가는 한 과정이었습니다. 첫 공연에서는 "파쿠르가 과연 예술이 될 수 있을까?" 를 시험받고 자문하면서 답을 얻어가는 순간이었습니다. 발레, 현대무용, 전통무용 등과 견주어 파쿠르가 과연 예술의 한 장르로써 인정받을 수 있을지 탐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두번째 공연에서는 파쿠르의 무대공간의 파괴와 창조성, 적응력을 시험받고, 그것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지방공연을 다니면서 매번 무대공간이 바뀌었고, 파쿠르는 주변환경을 이용한 움직임이다보니 단 한번도 똑같은 공연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새롭게 안무와 동선을 다시짜고 주어진 부족한 연습시간 속에서 짧은시간안에 적응해야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맨바닥만 있으면 똑같은 것을 그대로 할 수 있는 다른 예술장르들이 부러웠지만, 이게 파쿠르만의 독특함. 파쿠르 다워야 파쿠르가 아닌가? 하고 문득 생각의 전환을 할 수 있었고, 매 순간이 새로운 도전인 동시에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세번째 공연에서는 예술가라는 것은 무대 위에서 소비되는 존재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계속된 잦은 공연은 신체의 부상뿐만아니라 정신적인 피로감도 상당히 높다는 것을 체험했고, 그래서 그만큼이나 계속해서 강인해져야만 하고 준비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일기처럼 남길 수 있는 영상/미디어와는 달리 무대 위의 움직임은 공연이 끝나는 순간 마치 인간의 짧은 생 처럼 사라져버리고 만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다시 볼 수 없고, 그대로 사라져서 아쉽지만,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있기에 유한한 삶 속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듯, 무대 위의 움직임 또한 모든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네번째 공연에서는 내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그와 동시에 정점의 경지에 이른 다른 예술가들로부터 앞으로 나 스스로를 어떻게 발전하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발레리나 임혜경 선생님의 움직임을 보며 수십년간 성실하게 노력해온 존재의 지속성(Etre et Durer)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나이를 극복하고 계속해서 최고의 퀄리티를 유지하는 프로정신은 강인함의 또다른 모습이었습니다. 파쿠르 훈련자로써 나이가 들어도 지혜롭고 성실한 노력 속에 충분히 오래 움직일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현대무용가 예효승 선생님의 움직임을 보며 인간의 감정과 고뇌가 움직임을 통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미세함의 미학을 배웠습니다. 큰 기술, 어렵고 화려한 동작보다도 손가락 하나만으로, 단순한 움직임 속에 간단해보이지만 숙련도, 아름다움, 표현이 느껴졌습니다. 파쿠르에도 생각해보니 우리가 그동안 놓쳐온 미세함과 세밀한 것들이 충분히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연습해나가야할 방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전통무용 김영숙 선생님의 움직임을 보며 글로만 쓰여져있는 동양 철학과 사상이 움직임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음양오행과 사방신이 발의 스텝과 팔동작으로 표현되고, 처음에는 품위와 경건함이 느껴졌지만 계속 보게되면서 그보다 깊은 다음세대로 맥을 이어가고자하는 의지와 선조들의 역사가 겹쳐보였습니다. 변화무쌍하게 진화하고 있는 파쿠르 세계에서 먼 훗날, 창시자들과 올드스쿨 훈련자들의 움직임도 마치 걸어다니는 역사책이 되어 다음세대의 사람들이 원형과 기원을 찾아 맥을 잇고자하는 행복한 상상도 해보게됐습니다. 


현대무용가 김설진 선생님의 움직임을 보며, 세상의 모든 춤과 움직임을 탐구하고 자기만의 방식대로 융합한 높은 경지의 달인을 보았습니다. 마치 파쿠르로 치자면 카포에라, 트릭킹, 브레이크댄스, 아크로바틱, 육상, 기계체조, 클라이밍 등을 자유자재로 장애물에 표현하고 융합하면서 자기만의 새로운 움직임을 창조해내는 그런 경지를 보았습니다. 


이제는 한 우물에서 벗어나 세상의 수많은 새로운 움직임들을 체험해보고 내 움직임을 완성시켜봐야 겠다는 목표가 생겼습니다. 도전할 수 있어서, 저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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