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28일, 러시아 바이칼 호수로 10일 동안 여행을 떠났다.
나에게 있어서 여행의 의미는 폐관수련이다. 폐관수련은 요동치는 파도 속에서 이리저리 에너지를 발산해 온 내 몸과 정신을 다시 밖에서 안으로 갈무리하는 일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반평생 파쿠르의 인생을 살아온 나에게 '김지호의 인생'을 다시 살펴보는 작업이다. 한 해 동안 삐그덕 거리며 쌓여온 나의 부스러기들을 되돌아보고, 지금. 여기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정리하는 것이다.
여행이란, 나의 생각과 편견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깨부수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여행이란 매우 사적이고 주관적인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모든 경험들이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객관적인 안목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여행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제1원칙. 여행 중 마주하는 모든 것들은 직접 경험해 보기 전까지 판단하지 말 것. 경험했다 하더라도 최대한 판단을 기다리고, 유보할 것.
제2원칙. 여행 중 마주하는 모든 것들은 가치중립적이라는 전제하에 행동할 것. 경험 전, 중, 후로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면 눈앞의 사건, 사람, 환경을 탓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부터 관조(觀照)할 것.
제3원칙. 타지에서도 사람과 문화에 대한 포용과 존중이 함께하는 여행을 위해 나의 습관, 문화, 시스템, 제도, 고정관념으로부터 최대한 벗어나려 노력할 것.
잘 살펴보면 제1원칙부터 3원칙까지 결국 같은 말이다. 그만큼 여행을 통해 나의 생각과 편견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깨부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여행지로 바이칼 호수를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의 기원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다. 나의 조상들, 역사, 뿌리를 알려하는 것은 나의 정체성과도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자라온 고향 땅, 보금자리를 다시 찾았을 때, 느낄 수 있는 영혼의 울림을 바이칼 호수에서 찾고 싶었다. 이것이 태초의 흔적들과 오래된 이야기들이 전해지는 바이칼 호수를 선택한 이유이다.
진짜 여행은 골로우스트노예에서 시작됐다. 골로우스트노예에서 리스트비얀카(Listvyanka)까지 약 170km를 4일 동안 걸었다. 트래킹 코스는 호수 주변을 따라 나있어 대체적으로 쉬운 길이었지만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산사태, 지형의 침식으로 인해 길이 훼손된 곳이 종종 있었다. 훼손된 길을 마주할 때면 경사면을 따라 우회하여 가거나 산을 올라야 했는데 결국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Danger라는 경고 문구가 있었으나 이곳이 길임을 나타내는 표지판이었고, 표지판 안내에 따라 길을 걸어갔다. 그러다가 산사태로 인해 끊어진 길을 마주했는데 건너편에 제대로 된 길이 보였다. 경사면을 따라 우회해서 가면 되겠거니 싶어 마침 남아있는 발자국을 보고 올라갔다.
생각보다 경사면이 높아 자칫 잘못하다가는 무거운 캠핑장비, 백팩과 함께 절벽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올라가면서도 지형의 침식이 심해 손으로 잡을 만한 나무와 풀, 바위가 없었고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건조한 모래와 자갈들이 경사면을 따라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경사면 저 아래에서 동료가 "올라갈 만한 길이냐?"라고 몇 번 물어보았고 나는 그때마다 "올라오지 마세요."라고 답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건너편에 있는 온전한 길로 갈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믿고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다. 어느덧 나는 동료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버렸다. 산사태 시작점보다 위로 올라가자 온전한 지형이 있어 건너편으로 갈 수 있었다. 이제 길이 있는 곳까지 경사면을 내려가야만 했다. 산 중턱 경사면에서 저 아래 까마득히 호수변까지 내려다보자 순간, 내려가는 것은 올라가는 것보다 배는 위험하고 어려운 것임을 깨달았다. 나의 큰 실책은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내려가야 할 선택지를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료들이 있는 곳까지 왔던 길을 돌아가는 방법도 생각했으나, 이 역시 내려가야 하는 길이니 이왕 여기까지 온 것 지금 내가 있는 경사면에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엉덩이를 지면에 붙이고 무게중심을 최대한 낮추어 경사면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팩이 너무 무겁고 지형이 불안정했다. 백팩을 두고 왔어야 했다. 결국 내 무게를 버티지 못한 지면이 무너져 경사면 따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순간 내 삶은 여기 까지는구나. 싶었지만 다행히 속도가 제대로 붙기 전 경사면에 깊이 박혀있는 돌의 작은 틈새를 손가락으로 잡아 겨우 죽음을 면했다. 그러나 내 몸은 이미 극도의 긴장상태였고, 죽음의 공포로 인해 이성적인 사고는 정지했다. 손가락으로 버틸 수 있는 힘의 한계가 느껴졌다. 재빨리 다른 대안을 찾지 않으면 그대로 굴러 떨어져 바이칼호에 뼈를 묻을 상황이다.
죽음의 공포에서 어느 때보다 강렬한 생존본능이 나를 일깨웠다. 고요한 바이칼 호수는 하늘과 물의 경계가 없다. 백팩을 포기하고 저 아래 바이칼호로 던져버릴까 싶었지만, 이내 몸을 끙끙거리며 방향을 틀어 네발 걷기 자세를 잡고 발 앞꿈치로 경사면을 깊이 쑤셔 파내 몸을 지지할 틈을 만들었다. 배를 바닥에 완전히 밀착시키고 풀뿌리를 잡아채며 겨우 완만한 경사면에 이르렀다. 마음을 다잡으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여기에 고립되느니 차라리 살기 위해서 내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돌아가는 길은 여기까지 왔던 것보다 몇 배는 위험하고 어려웠다. 그러나 지형지물을 예측할 수 없는 길을 내려가느니 왔던 길을 돌아가는 것이 훨씬 나았다. 천천히 돌아 내려가다 보니 저 아래에 여자 친구가 위를 올려다보며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거리가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 친구의 긴장된 표정과 걱정의 시선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으니 세상을 헛살지는 않았구나 싶었다. 그와 동시에 말로 형용할 수는 없지만 불안 속에서 작은 확신이 피어올랐다. 한발 한발 천천히 내딛으며 마침내 경사면에서 내려왔을 때, 안도의 한숨보다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특히 내가 방금 어떤 것을 경험했는지 상관없이 저 멀리서 웃고 떠들며 자신의 일상을 즐기고 있는 동료들을 보면서 아쉬움보다도 내가 처한 상황을 제 삼자의 입장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잔인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자연은 '나'의 일상뿐만 아니라 죽음까지, 단 일초도 관심이 없다. 관심을 받는다 할지라도 구름처럼 있다가 흩어질 뿐, 그것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을 외부에 바라거나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 마침 인천공항에서 이르쿠츠크로 향하는 비행기 편에서 읽었던 이성복 시인의 에세이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일상적인 삶은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전’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다. 예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면 예술은 일상적인 삶과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 - 이성복 시인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中
나는 파쿠르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일상에서 진정한 삶으로 전환되는 경험을 했지만, 1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자 그 삶 자체도 사실과 안전으로 가득 찬 일상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자신의 고유한 분야 혹은 꿈에 대해 조예가 깊어도 그것의 느낌과 위험이 상실되는 순간 일상적인 삶으로 이행될 뿐이다. 내가 바이칼 원정을 떠난 이유는 일상이 되어버린 삶에 느낌과 위험을 복원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런 의미에서 방금 죽을뻔 한 경험은 내 자신을 느낌과 위험의 세계로 던져 넣은 것이 분명하다. 이 경험에서 가슴깊이 새기게 된 배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번 들어선 길은 앞으로 가는 것보다 되돌아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며 앞을 내다볼 수 있어야 진정한 자신의 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인생의 본질은 장애물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끝없이 해야할 것들, 하고싶은 것들, 미래에 있을 계획들, 목표로 인해 현재를 희생시켰다. 과거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는 시간을 보냈다. 나를 변화시켜 준 꿈이 되려 나를 잡아먹었다. 어쩌면 나는 바이칼의 위험한 경사로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다가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한 채 낭떠러지로 추락할 수도 있다. 잊고 싶은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용기와 마음의 여유가 필요한 일이다. 바이칼 원정에서 얻은 첫 번째 교훈은 '다시 되돌아갈 용기'와 '자신의 위치를 알아채는 신중함'이다.
이는 자신의 삶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짓지 않고 하나로 일치시키는 삶을 향한 첫번째 열쇠가 아닐까?
나는 그동안 불모의 땅 한국에서 파쿠르의 길을 개척해 오면서 내가 성취해 낸 도전들, 파쿠르를 널리 전파시켜 온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내가 이룩한 것들에 대해 나도 모르게 '내 것' 이라는 '소유'와 '집착'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자 자부심을 가져왔던 모든 기억들이 내게 고통이 되어 돌아왔다. 나는 초심을 잃어버리고 딱딱한 집착의 탑을 쌓아온 것이다. 파쿠르에 대한 나의 집착이 과했던지 어느날 나의 절친한 친구가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호. 너는 김지호가 아니라 파쿠르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아. 진짜 김지호의 인생은 어디있니?"
이것이 바로 내가 바이칼 호수를 찾게 된 또 다른 이유다. 반평생을 파쿠르에 봉사한 내 자신을 잠시 파쿠르 세계 밖으로 끄집어내어 '나'를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관찰하기 위해서 말이다. 파쿠르가 아니라 인간 김지호를 제대로 직시하고 싶었다.
내가 행하는 모든 일들에는 집착이 있다. 집착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 또한 집착은 미래의 가능성을 과거의 테두리에 가두는 일이기도 하다. 자유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그 테두리를 벗어 던지기로 결심했다.
자유는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 순간 자신을 관찰하고,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수고로움이 있다. 그러나 자유를 한번이라도 제대로 만끽해 본 적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런 수고로움은 기꺼이 감수해서라도 자유를 누리고 싶어할 것이다. 나는 파쿠르를 통해서 처음으로 자유를 경험했다. 파쿠르는 내가 인생의 주인공이자 시간의 주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집착을 내려놓는 것은 내가 원하는 삶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그래서 바이칼 호수 둘레길 170Km를 걸으며 자유로운 '나'를 위해 매일 돌을 쌓고 부수기를 반복했다.
무게가 각기 다르고, 표면도 울퉁불퉁한 돌들을 서로 맞물려 탑을 쌓기란 쉽지 않다. 처음에는 1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3층으로 '높이 높이' 쌓는 것에 집중했으나 점점 쌓기 편한 돌을 고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서 높이 쌓는 것을 관두었다. 내게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수련의 과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여, 4층 미만으로 돌과 돌 사이에 균형을 찾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자 신기한 각도로 균형을 잡고 있는 돌탑들이 완성되기 시작했다. 하나의 돌탑을 쌓는데만 최소 30분 이상이 걸렸지만 하나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서 돌탑을 계속 쌓게 되었다. 내게 파쿠르 말고도 재미있는 취미가 생긴 것이다.
아름다운 바이칼 호수를 배경으로, 돌탑들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보자 나 스스로 예술가가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순간 여자친구가 나의 소중한 돌탑들을 손으로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자기만족에 빠져 있던 나는 순식간에 당황스러움을 넘어 불쾌함이 치밀어 오르려던 찰나, 내가 왜 한낱 돌덩어리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야 하는지 상념에 잠겼다.
돌덩어리 이면에는 나의 시간, 나의 노력, 나의 열정, 나의 성취, 나의 정성이 담겨있다. 돌탑을 쌓고 있는 중에는 그런 가치들을 몸소 실천하는 수련자가되지만, 돌탑이 완성된 순간 부터는 벽장 안에 있는 트로피처럼 지켜야할 대상이 되어버린다. 지켜야하는 대상이 되어버린 돌탑에는 수련하는 '나'가 없다. 오히려 완성된 돌탑들은 수련하는 나를 가로막는 집착과 소유의 상징이 된다. 이러한 것들은 마치 내가 성장, 변화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공부하는 사람, 몸 쓰는 사람, 말 하는 사람, 만드는 사람들이 실제 수련은 그만두고 한 편을 지키는 일에 몰두하게 되는 원인은 여기에 있다.
과거의 성적으로 지금을 살아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정지된 것은 죽은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움직인다. 나의 생각도 몸처럼 자유분방하게 움직이기를.
나는 쌓아올린 돌탑들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공들여 돌을 쌓아 올리면 허망하게 무너뜨리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완성한 나만의 작품이라는 생각 때문에 마음 속에 아까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쌓고 무너뜨리는 일을 반복하면서 좋고 싫은 것도 없이 무심하게 돌 쌓는 놀이에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
돌탑을 쌓으면서 나의 지난 날을 반성했다. 옳은 것, 틀린 것,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지어 한편에 서는 일을 일구어 왔다. 그 결과 내가 한편에 서는 일을 하는 만큼이나 정반대편에서 나에게 되돌아왔다. 때로는 경쟁으로, 폭력으로, 억압으로, 스트레스로.
몰입의 상태(Flow-state)는 자연과 같아지는 일이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본질은 가치중립적이다. 자연에는 좋고 나쁨, 선악, 성공과 실패가 없다. 오직 무심하게 끊임없이 변화할 뿐. 그러므로 자연과 가까워지는 일은 스스로 가치중립적인 존재가 되는 수련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