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프랑스 이민자들의 거친 콘크리트 도시이자 파쿠르의 탄생지 Evry에 있다가 갑자기 대자연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자 생소한 느낌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러시아 바이칼 호수에서의 캠핑 경험 덕분에 금방 자연에 적응했다.
프랑스 퐁텐블로(Fontainebleau) 숲은 파리에서 자동차로 약 1시간30분 거리에 위치해 있는 갸띠네 프헝쎄(Gatinais Francaise) 자연공원에 위치해 있다. 산이 많은 한국과 달리 평지에 넓은 숲이 펼쳐져있고 다양한 모양의 기암괴석이 가득했다. 이 바위들을 처음 보면,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 처럼 보이지만 자연이 선사한 천혜의 예술작품들이다. 심지어 바위 주변은 부드러운 사암 모래들로 가득해 마치 바위로 이루어진 바다에 온 느낌이다. 퐁텐블로 숲은 중세시대부터 오랫동안 왕실의 사냥터로 사용되어져 왔고, 19세기에는 자연 풍경을 주로 그리던 바르비종파(École de Barbizon) 화가들의 좋은 야외 작업실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파쿠르, 클라이머, 슬랙라이너, 명상 및 요가 수련자들의 메카로 자리잡았다. 고대 인도의 수행자의 숲이 현존한다면, 퐁텐블로만한 곳이 있을까 싶다. 거대하게 펼쳐진 기암괴석의 바다를 올라가는 클라이머들과 그 사이를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파쿠르 수련자들이 조화를 이룬다. 모두 자신의 수련에 몰입되어 있다. 그러나 파쿠르든 클라이밍이든 분야를 불문하고 자연 속에서 움직이는 순간 퐁텐블로의 모든 수행자들이 마치 가족처럼 나를 반겨준다. 그들의 표정과 행동에서 즐거움, 배려, 웃음, 행복, 겸손, 도전, 인정이 가득하다. 길거리 소매치기, 도둑이 흔한 프랑스임에도 불구하고 소지품을 아무곳에나 두어도 훔쳐가는 사람, 의심하는 사람, 걱정하는 사람조차 없다. 풍텐블로 숲에 들어온 순간, 서로 처음 대면하는 사이일 지라도 눈에 띄지 않지만 느슨한 커뮤니티에 가입된 것이다.
나는 독일 파쿠르를 대표하는 ParkourONE 커뮤니티와 퐁텐블로의 여정을 함께했다. ParkourOne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파쿠르 단체이다. 독일의 30여개 도시에서 파쿠르 놀이터 및 아카데미, TRust라는 자체 파쿠르 지도자 자격과정, Etre-Fort라는 세계 일류 파쿠르 의류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대학교와 산학협력하여 파쿠르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파쿠르 관련 논문 및 데이터를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유한 단체이기도 하다. 파쿠르 종목 자체를 해당 국가에서 독점하는 단체는 세계적으로 드문데 ParkourONE이 바로 그렇다. ParkourONE은 매년 8월 초 무렵, 퐁텐블로에서 10일간 파쿠르 캠프를 연다. 커뮤니티에 기반한 이벤트이다보니 특별한 프로그램이나 참가비는 없다. 정해진 시간에 맞게 각자 알아서 캠핑장비를 챙겨오고, 원하는 곳에 텐트를 친다. 정해진 일정도 없어서 아침에 일어나 즉흥적으로 운동하러 가거나 휴식을 취해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각지에서 200여명의 파쿠르 수련자들이 모인다. 이런 이벤트가 가능한 이유는 ParkourONE 커뮤니티의 주축은 10대가 아닌 20~40대 성인이기 때문이다. 직장인/사회인이되어도 파쿠르를 지속하는 모습을 보며 10대 때 잠깐 즐기다 성인이되면 관두는 한국의 파쿠르 현실과 대조되었다. 또한 커뮤니티의 기능이 단지 파쿠르 모임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함께 한다는 것에 큰 차이가 있다. 이들은 파쿠르뿐만 아니라 친구, 결혼, 육아, 직장, 휴가, 취미, 여행, 고민의 시간을 함께하고 나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커뮤니티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커뮤니티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지식이 '축적'되어야 한다. 축적은 '파쿠르'라는 취미를 공유하는 관계 뿐만 아니라 삶을 함께하는 동반자로 확장되어야만 가능하다. 나는 지난 15년간 파쿠르를 해왔지만 취미를 공유하는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라는 인간 자체가 사람보다는 파쿠르라는 목표 달성에만 관심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퐁텐블로에서 만큼은 사람과 자연에 관심을 두기로 결심했다. 스마트폰, 카메라 등 모든 전자기기는 아예 멀찌감치 치워두었다. 마침 스마트폰을 충전할 곳도 여의치 않아 5일 동안 강제로 스마트폰과 멀어지게 되었다.
첫날에는 Elephant라 불리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바위 모양이 코끼리를 닮아 엘레폰트라 이름이 붙여졌다. 한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와서 2년간 함께 운동했던 독일 친구 Julius Hab가 차를 끌고온 덕분에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워밍업 겸 Floor is Lava(용암놀이)를 시작했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고 바위사이로 이동하는 놀이다. 바위 사이를 뛰어다니고 오르다보니 어느새 땀이 흐르고 체온이 상승했다. 난이도도 점점 올라가서 결국에는 브레이킹 점프(Breaking jump)의 연속선상이 되었다. 절벽 낭떠러지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나무가지로 매달리고, 손으로 잡거나 디딜곳이 없는 둥그스름한 바위 모서리로 점프하는 등 울퉁불퉁하고 변화무쌍한 자연지형지물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러나 압박감이나 스트레스보다는 동료들과 함께 위험을 감수하면서 재미와 즐거움이 가득했다. 마치 어린시절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뛰놀 때 처럼 말이다. 신기한 형태의 바위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일련의 과정들은 모험 그 자체이다. 자연이 제공하는 수많은 문제들을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고, 몸으로 부대끼며 풀어나갔다. 그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뛰놀다가 배고픔을 느끼면 바위 지대 앞에 넓게 펼쳐진 부드러운 모래사장과 서늘한 나무 그늘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곳곳에 사람들이 설치한 슬랙라인과 해먹, 요가매트들이 안락한 휴식처를 제공해 주었다. 캠핑장으로 돌아오자 친구들과 함께 강에서 수영을 했다. 수영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어 현장에서 친구들의 설명에 따라 수영을 연습했다. 차가운 물, 강바닥의 날카로운 돌들, 힘겨운 호흡, 사람들의 시선 등 불편한 것들이 많았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고, 나의 약점을 개선한다는 것에 만족했다.
Julius, Martin Heinrich, Andreas 등 독일 친구들은 다리 위에서 각가지 묘기를 펼치며 다이빙을 했는데 높이는 둘째치고 강 수심이 그리 깊지않아 상당히 위험했다. 이미 강물 속에 들어간 친구들이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라고 나를 보챘다. 그러나 수영을 제대로 못하는 나는 뛰어내리는 것보다 그 이후의 일이 걱정되어 도전을 미루었다. 덕분에 매일 아침, 저녁으로 강으로 끌려가 수영을 배웠다. 나는 퐁텐블로 여행 내내 독일 친구 Andreas의 텐트에서 지냈다. 캠핑장 인근에는 아름다운 강과 다리, 마을이 있다. 캠핑장에는 ParkourONE에서 설치한 퐁텐블로 파쿠르 장소 안내 표지판이 있다. 구글맵 기반으로 파쿠르 장소들이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어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운동하기 편리하다.
이틀차에는 Doggystyle이라는 장소에서 맨발 파쿠르 수련을 했다. 오랫동안 신발을 신으며 잃어버렸던 발바닥의 감각을 다시 일깨웠다. 신발을 신었을 때처럼 큰 점프를 할 수 없지만 보다 정확하고 절제된 움직임을 연습할 수 있었다. 사실 퐁텐블로를 찾은 많은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신발을 신지 않는다. 맨발걷기가 주는 건강의 힘을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주변환경이 이러할진대 나도 저절로 맨발생활에 적응이 되어갔다. 어쩌면 우리는 '더러움', '위험'에 대한 기준을 진지한 고민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경험들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셋째날에는 퐁텐블로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올라가 불빛없이 동굴 속을 탐험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어둠 속에서 길을 찾기위해 손과 발을 휘저어 댔다. 동굴 탐험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나의 인생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깊은 어둠 보다도 더욱 두려운 것은 숨막힐듯 좁은 통로였다. 머리와 몸이 천장에 닿을 만큼 좁은 길을 지나가야할 때, 형용할 수 없는 답답함이 심장 속에서 메아리 친다. 이보다 더 위험한 상황은 동굴 안에서 길을 잃었을 때이다.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을 때,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못잡고 이리저리 방황한다. 헤매면 헤멜수록 고르디우스 매듭처럼 가야할 길이 꼬였다. 뒤에서 따라오던 일행 중 누군가가 길을 발견하기 전까지 나는 동굴 안에서 허우적댔다. 바다를 항해하는 뱃사람들에게 방향을 안내하는 별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심연 속에서 빛줄기를 뿜어내는 작은 별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희망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나는 그 순간 나의 꿈,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이 내가 길을 잃었을 때, 다시 바른 길로 인도해줄 수 있는 별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비춰줄 작은 별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
넷째날에는 Desert로 향했다. 이름 그대로 모래바다위의 바위섬 같은 공간이었다. 자연의 힘은 실로 위대하고 아름답다. 자연주의 화가들이 왜 이곳을 찾았는지 단번에 느낄 수 있는 풍경이었다. 모래사장에서 프리즈비를 하며 뛰어노는 아버지와 아들, 깊은 구덩이를 파는 소년, 높은 바위를 올라가는 딸을 격려하는 어머니, 나무에 매달려 점프하는 소녀들이 보였다. 이곳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구경꾼, 감독관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경계없이 움직이는 '무버(Mover)'이다. 적극적인 공감과 이해는 제3자로서 보거나 듣는 행위 뿐만 아니라 몸으로 직접 경험하는 것에서 극대화된다. 이곳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면 먼저 밝게 인사를 해주고, 만나거나 떠날때면 가슴깊이 껴안아준다. 격식차린 예의가 아니라, 허물없이 사람을 대하는 것에서 부터 관계가 시작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어진 거리 표시가 여기서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마지막날 나는 드디어 다리 위에서 다이빙을 해냈다. Julius는 "I am so proud of you" "너가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해주었다. 나의 존재를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가장 좋은 말이었다. 나의 성공에는 종종 타인의 시기와 경쟁, 질투가 함께했다. 그래서 어떤 것을 성취했더라도 고개를 숙여 겸손한 태도를 보여야만 보이지 않는 추후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진심어린 누군가의 응원과 감동에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이곳에서 무엇이 진짜 칭찬인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캠프파이어 퐁텐블로 숲의 밤은 특별하다. 밤하늘의 찬란한 별들을 한없이 바라보다 보면 별똥별의 괴적을 쫒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캠프파이어를 주변으로 이야기꾼들이 모여들고 음유시인이 기타와 싱잉볼을 연주하며 분위기를 복돋는다. 장작을 태우는 불꽃이 잦아들 때 쯤, 고요한 숲의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짧으면서도 길었던 숲에서의 시간은 영원할 줄 알았던 일상의 관계와 보금자리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이를 통해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태도를 배웠다. 퐁텐블로에서 경험한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사진,영상은 거의 없지만 앞으로도 나의 기억 속에 살아 숨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