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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쿠르 코치 김지호 Oct 21. 2023

고통없는 사회에서 고통을 말하다


사막은 마치 걸음이 느린 파도와 같다. 능선 끝에 설때면 파도의 경사면을 타고 올라온 모래가 서핑하듯 반대편 내리막으로 흩날린다. 문득 모든 생명의 끝은 사막과 같지 않을까 싶다. 바다에서 태어나 사막으로. 죽음이 사막과 같다면 그 끝 조차 변화 그 자체이리라.


장애물이 없는 사막으로 가면 어떻게 파쿠르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데저트 파쿠르(Desert Parkour)를 해보고 싶었다. 장애물이 없는 곳에 간다면, '나'라는 장애물을 마주할테니. 극한의 제약으로 모험할 수록, 보여지는 사물 이면의 세계를 탐구할 수 있다.


어두워진 사막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해가 지자 숨어있던 생명들이 언제 그랬냐는듯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왔다. 사막에서 새 소리가 들린다. 뻐꾸기 소리도 들린다. 사막 모기들도 튀어나와 내 피부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댐을 내려가는 길에 뾰족한 가시풀들이 바지를 뚫고 피부를 찔렀다. 


순간 몸에 느껴지는 고통의 감각들이 좋았다. 세디스트적인 태도라기 보다는 하루종일 스마트폰만 쥐고 방구석에 쳐박혀 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도파민과 보상을 얻는, 고통이 완벽하게 차단된 삶보다 고통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는 지금 이 순간이 좋았다. 


니체는 그의 저서 <도덕의 계보>에서 '고통'의 진정한 가치를 이렇게 설명한다. 


"고통을 보는 것은 쾌감을 준다.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더욱 쾌감을 준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책세상, 2002), 407쪽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남에게 고통을 주고, 그것을 보고 즐길 수 있을 때 그 고통이 참된 의미를 지닌다니? 


파쿠르 세계에는 스승과 제자 관계를 추구하지 않지만, 내 마음의 스승인 야마카시(Yamakasi) 창시자 '차우 벨(Chau Belle)'을 2016년, 서울에 초청했을 때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차우 벨은 나를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가 팔굽혀펴기 1,000번, 발차기 1,000번을 시켰다. 정확히는 누구도 강요한적도 없고 차우벨 본인도 참여했으므로, '시켰다'기보다는 '함께 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도전과제는 놀이하는 아이들처럼 서로 이야기 나누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정해졌다. 


팔굽혀펴기는 100회가 넘어가는 시점부터는 고통 그 자체였다. 그에 반해 발차기는 차라리 휴식시간이었다. 여기저기서 고통에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우 벨은 그때마다 직접 몸으로 실천하는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용기를 복돋아 주었다. 신체적, 정신적 고통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함께 참여하는 구성원들 사이에 고통을 연대하고, 공감하는 바이브(Vibe)가 형성됐다. 약 3시간 뒤 도전을 끝마칠 수 있었다. 이때의 후유증으로 상체가 붓고, 1달 동안 팔굽혀펴기 1개 하기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런 무식한 트레이닝 방법을 미화하려고 하거나, 권장하려고 이 이야기를 꺼내든 것이 아니다. 현대 스트렝스 이론과 실전에도 전혀 맞지 않는 이 무식한 방법을 왜 했던 것일까? 


과학과 객관성, 카티시안(Cartesian, 데카르트 주의)의 세례를 받은 (근)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운동은 객관적인 데이터와 수치, 정해진 난이도와 부하, 세트, 횟수대로 몸을 끼워맞추거나 관리하는 습성이 익숙하다. 생각으로 존재하는 '나'가 변화하는 '몸'보다 더 높게 평가되며, 몸을 정신의 지배하에 둔다. 이렇게 했을 때, 사람들은 자기 생각대로 몸을 견인시킬 수 있다는 '전능감'을 느낀다. 그러나 외부의 객관적인 '숫자', '데이터', '기준' 혹은 몸짱으로 대변되는 절대 다수의 타인들이 인정하는 '보편성', '이념', '상징'에 몸을 소비시켜가는 과정은 '괴로움'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고통은 '괴로움'만 있는 것이 아니다. 팔굽혀펴기 1,000번과 발차기 1,000번이 즐거운 순간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고통으로 인한 괴로움 보다도 일종의 '축제', '놀이',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그 어디에도 '억압', '죄의식', '가책' 같은 부정적인 의미가 없었다. 고통의 입체적인 면모와 범위를 느끼고, 연대할 수 있는 감수성은 '자기계발', '자기관리'보다 다양한 몸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축제, 놀이에서 길러질 수 있다. 어린시절 기억을 떠올려 보면 모든 옛 놀이는 고통을 나누는 나름대로의 벌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 벌칙을 겪고 즐기면서 놀이는 더 즐겁게 된다. 니체가 말한 고통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유튜브를 보다보면 파쿠르하는 사람들을 혐오하는 댓글들이 넘쳐난다. 어쩌면, 우리는 놀이로서의 고통을 잊었기 때문이 아닐까? 되려 학교, 학원, 군대, 사회적 역할과 책임, '자기 앞가림'으로 상징되는 '억압적인 기제'로부터의 고통만 알기 때문이 아닌가? 


억압은 자기를 향한 죄의식과 가책을 키운다. 그래서 자기가 떠안아 왔던 '억압'들을 누군가가 못 견뎌 하거나 탈피하는 모습을 볼 때, 그들을 향한 원한과 증오, 혐오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어쩌면 파쿠르하는 사람들을 혐오하는 이유는 억압된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파쿠르는 너무나도 자유롭고 신나보이기 때문이리라. 쉽게말해 "나는 이렇게 억압받아왔고 견뎌왔는데 너는 왜 안그래? 너도 나처럼 똑같이 살아야지!"라는 논지다. 


자기 안의 생명이 용솟음치는대로 살아볼 수 는 없을까? 


나는 여전히 파쿠르에서 답을 찾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놀이로서의 고통을 주고받으며 즐길 수 있는 파쿠르야말로 분열된 사회, 개개인들의 '화해'를 도모할 수 있지 않을까. 파쿠르를 하면 너도나도 무뚝뚝했던 표정을 내려놓고 즐거이 웃는다. 사회적 억압, 자신의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놀이로서의 고통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다. 그래서 파쿠르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구원'의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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