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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엉 Sep 29. 2021

시크?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얼레벌레 스타트업 마케터의 일기 #5. 포기는 빠를 수록 좋다.



월말이다. 다가오는 새로운 달의 이벤트를 준비해야 한다. 휴... 이번 달 디자인 그대로 갖다 쓰려다가 빠꾸를 먹었다.


시크한 디자인으로. 다시.


내가 찾아갔던 건 톤 앤 매너 변경이었고, 알록달록한 걸 싫어하셔서 최대한 발랄함을 죽여 놓은, 아주 가을 같은 색상 참고 시안들이었는데... 음... 프로모션, 이벤트 페이지에 시크함이 있을 수 있나? 브랜드 기획전도 아닌데.


여행업계에서 일했던 나는 시안에 '검은색'을 쓴다는 걸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저 시크함 때문에 몇 번이고 혼나는 동료들을 봐 왔기 때문이다.


길더라도 되도록이면 모든 내용을 다 담아야 하고, 시선을 끄는 (비키니나) 멋진 풍경 사진, 원색, 형광색, 느낌표를 주로 사용한 시안을 만들어왔었다. 그랬던 나는 여기에 와서 명품과 프리미엄 브랜드를 다루게 되면서 럭셔리한 시안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게 많이 낯설었다.


대안으로 아주신 시안은 블랙프라이데이라서 검은색을 쓴 시안이거나, 사이버 먼데이 배너, "영문이라서" 시크해 보일 수밖에 없는 시안들이었다. 이것들을 눈앞에 두고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를 외치고 있는 우리 페이지에 녹아내려니 답답하기만 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매 월 말에 느끼는 거지만, 평소에 쌓인 레퍼런스가 정말 중요하다. 이렇게 시간이 촉박해졌을 때, 평소에 내가 뭘 보고 살아왔는지가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작년 이 맘 때쯤, 내가 자주 들어가는 브랜드, 어플들의 프로모션 페이지와 배너 시안이 너무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궁금해서 우리 디자이너한테 "요즘 이 디자인이 왜 이렇게 많이 보일까요? 유명한 디자인인가요?"하고 물어봤더니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도 '유행'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했다.


여기저기서 봐 둔 게 많을 때, 그리고 어느 순간 인지하고 났을 때, 그때부터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더 많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내가 필요한 때에 저 무의식의 언저리에서부터 자그마한 힌트라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건 나를 믿는 게 아니라, 레퍼런스의 힘을 믿는 거다.


레퍼런스의 꽃말은 '막상 찾으려고 하면 절대 안 나옴'이니까, 사소한 것도 굉장히 자주 캡처하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 최근에 스크린샷 폴더의 이미지 개수가 1만을 찍어서 싹 비웠었는데, 또 금세 7천 장 정도 쌓아가고 있다. (하지만 뭐 나름대로 잘 써먹고 있으니 됐다.)


스크롤을 내리시는 찰나, 0.1초 사이에 '아, 저거.'하고 생각하게 될 수 있게 되려면 평소에 많이 보고 듣고 즐기도록 하자.






그리고 시크함이라는 단어는 하나지만 사람마다 생각하는 건 다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엘사일 수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김혜수 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나의 상위자의 콘셉트에 대해 이미 파악을 끝냈다면 좋은 거고, 정 모르겠으면 물어보는 거다. 그래야 시안을 빨리 끝내고 른 일을 할 수 있다.


빠른 포기 그리고 절충하는 능력이 의외로 시간을 벌 수 있는 꿀팁이기도 하다. (절충이라고 쓰지만 간극을 좁히는 건 늘 내 쪽일 거다. 잘 가, 나의 다크 그린 시안...)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과 나의 상위자가 오케이 할 정도의 '느낌적인 느낌' 사이에서 컨펌을 받는 것(하지만 나처럼 그도 역시 많이 포기하신 걸 수도 있다는 사실^_ㅠ), 그리고 그 애매한 경계를 더 예쁘게 포장하기 위해서 디자이너에게 자세하고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작업을 해주는 건 디자이너니까.


그리고 현재는 인력이나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여 그저 헤더 리사이징을 할 뿐이지만, 사실 썸네일이나 배너에 들어가는 문구도 'chic'해 보이게 다듬어야 한다는 사실도... 너무너무 잘 알고 있다. (마케팅 솔로는 이렇게 매일 슬프다. 알면서도 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전단지가 고상한 거 봤나 싶다가도, 내면은 비록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지만 외모는 그렇지 않았으면 하는 것. 말씀하신 '시크하다'는 건 그런 의미일 것이다. 다음 달엔 한 번에 컨펌받고 싶어 하는 나... 제법 초딩 같아요...







여담... æspa 트위터에서 보고... 너무 많이 놀랐다... æspa도 이런 이벤트를...? 하는구나... 나의 Chic 한 윈터 아기를 왜... 이렇게...❄


엔터테인먼트도 대행사를 쓰나...? 대행사가 바뀌었나...? 환각 퀘스트를 이렇게 풀다니... 오노...



아냐... 장난치지 마시고... 빨리 내 æspa 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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