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션 백신을 얻을 수 있다는, 21세기 덕후라면 한 번쯤은 가봐야 한다는 그 전시... 뉴 랜덤 다이버시티.
찐 백신 맞기 전, 내 마음은 어떤 색깔인지 궁금해서 이 전시를 꼭 보러 가고 싶었다. 언제 예매했더라. 암튼 친구를 데리고 다시 예매해 보려고 들어가니까 매진, 매진, 매진... 최애가 있는 오타쿠라면 한 번쯤은... 해봐야하지 않나, 한 건데 역시... 오타쿠들이란... 발이 빠르다. 아무튼 지금 가장 핫한 전시인 건 맞는 것 같다.
전시의 개요를 설명하자면, 치환하는 작업을 하는 거다. 먼저 내가 특정한 사진을 볼 때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내 뇌파로 측정해서 , 그걸 색깔로 치환해주는 전시이다.
이 날 미용실에 갔다가 전시를 보러 간 거였는데, 어떤 사진을 고를까 고민하다가 입덕한 사진을 가지고 갔다. 굉장히 신기한 경험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버스를 타고 전시장으로 향했다. 이 날 날씨는 아주 꾸리꾸리하고 당장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았다. 주말이고 북촌이어서 그랬는지 커플들이 많았다. 케이팝에서 유명해진 전시이기는 하나, '각자를 생각하는 머글 커플들도 올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연애할 때는 이런 거 많이 했었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터덜터덜 걸었다.
2시 정각 입장이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빨리 도착해서 혼자였던 나는 그냥 줄을 서 있기로 했다. 사실 '어떤 색깔이라도 크게 의미는 없어~'라고 생각은 했지만, 결과가 막상 내가 실망할 만한 색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색이 나올 수 있을까?', '나는 은연 중에 사랑도 이런 식으로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 이런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들과 함께. 앞뒤로 선 관람객들이 나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아이돌 이름을 이야기해서 공방 줄 같네,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들어가면 전시에 대한 설명이 적힌 종이를 준다. 그리고 종이 아래 쪽의 카톡 1:1 채팅방 QR 코드로 들어가서, 내가 병에 붙이고 싶은 닉네임을 설정하고 내 뇌파를 측정해보고 싶은 사진을 보낸다.
내 최애를 처음 좋아하게 된(첫 눈에 반한) 사진이라서 '나 이거 하다가 울면 어떡하지' 요새 자꾸만 벅차고 그러다 우는 나를 생각하다가 "늙었나봐..."하고 혼잣말을 내뱉기도 했다. 그 사진은 파란 톤이라서, 사진을 하도 봤더니 '이러다 파란색 나오는 거 아냐?' 키득키득, 마스크 아래로 또 괜히 웃음이 번졌다.
뇨끼ㅠ 너무웃김 ㅠ 노란색이라서 더 웃겼음...하
마치 병원처럼 한 명씩 들어오라고 부른다. 그리고 VR 기계를 쓰게 되는데, 먼저 내 뇌파를 측정한다. 파란색이 나올까 걱정했던 나는, 내 눈앞의 파란색을 보고 아마 '시원하다'하고 생각하다가, '춥다'라는 감정을 느꼈던 것 같은데(실제로도 전시장의 에어컨이 너무 빵빵했기 때문...) 내 최애 사진이 뜨자마자는 '흐아아앙 ㅜㅜ 너무 예뿌당... 귀엽다...' 이런 생각만 들었다. 내가 고르고, 전달했고, 이미 여러 차례 봤고, 뭐가 나올지도 다 알고 있는데도 왜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해 본 분들은 알겠지만 그 측정하는 화면이 그럴 수 밖에 없는 화면이기도 하다. 굉장히, 압도되는 듯한 느낌...)
암튼 그래서 울기 싫어서 입을 꾹 누르고 있다가 끝났다고 하셔서, VR기계를 벗고 옆에 이제 '내 최애를 보고 느낀 내 감정의 색깔을 뽑아내는 작업'을 하는 곳에 앉았다. 새로 물을 갈아주셔서 물에 채워지는 나의 '너를 생각하는 마음'.
어떤 색이 나올까, 엄청 기대하고 있는데 피 같은 빨간색이 뚝. 뚝. 뚝. 떨어졌다(나중에 보니 b가 100%). 추출해주시는 분이 사진 속 그 친구는 누구냐고 물어봐 주셔서 최애의 그룹명과 이름을 말했다. "오, 잘생겼네요."라고 해주셔서 무척 뿌듯했다.
"무슨 생각 하셨어요?"
"어... 너무 예쁘다? 귀엽다?"
그런 생각을 했다고 말했는데, 그게 딱 내 눈앞에 떠오른 빨간색-노란색으로 넘어가는 색깔을 보고 느꼈던 감정이었다.
빨간색은 가장 처음에 뜬 색깔이었는데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나서 좀 무서웠고, 노란색은 뭔가 몽글몽글, 귀여웠던 것 같다. 그 감정이 내가 내 최애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이었기 때문에 그 색깔로 이어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색이라서 너무 좋았다.그래서 "제가 진짜 좋아하는 색이에요!" 했더니 신기하다고 하셨다. 사람들마다 다 다른 걸까. 아무리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사진을 가져간다 해도, 자기가 좋아하는 색이 꼭 나오는 것도 아니라는 게. 그게 정말 신기하기도 했다.
저 영상에 의하면,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같은 뇌파를 가지는 순간이 없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가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인지할 때의 순간은 영원히 같을 수 없고, 늘 새롭고, 다채로운 순간들인 것. 내가 지금 나의 최애를 좋아하는 이 순간의 감정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색의 의미가 아닌, 내 감정 데이터로만 색을 다시 바라보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들을 재정의하는 것부터가 출발. 전시에 가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후기도 많이 읽고, '아 나도 이런 색깔이 나오면 좋겠다'하고 생각한 것도 있었는데, 나중에 전시의 의미를 알고 나니까 '지금 내가 너를 생각하는 감정에 집중'하는 게 맞았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걸 유심히 보고 후기를 아~무리 찾아 본들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남의 사랑도 사랑이지만 내 사랑에 집중하는 시간. 내 생각과 감정을 들여다봐야 하는 시간. 내가 어떤 감정을 느낄 때의 색상을 먼저 측정하는 거고, 내 최애를 볼 때는 내가 어떤 감정에 가장 크고 우선적으로 지배되는지 알 수 있는 거라서.
집에 오는 길에 내 최애의 색이 되어버린 주황색 장미를 샀다. 바꿔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는 색깔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이, 결국은 다시 내가 최애를 볼 때 드는 생각의 색깔이라고 생각해보니까 너무 좋았다. 넌 나를 기분 좋아지게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는 거니까.
요즘은 삶의 반경도, 느끼는 감정들도, 매일매일 비슷하다 보니까, 그 날 그 날의 감정에 크게 집중하면서 사는 게 되게 어렵다고 생각했었다. '어차피 감정이라는 건 흘러가버리면 그만인 건데...' 하면서 적당히 살았던 것 같다.
덕분에 굉장히 오랜만에 나에 대해, 내 마음에 대해 온전히 집중해야 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나는비슷한 일상의 와중에, 그나마 최애가 있어서 좀 다채롭고, 재미도 있고, 가끔은 슬펐다가 또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끼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에. 회사 동료들은 맨날 재미가 없다고 한다. 재미있는 일 없냐며 나를 다그칠 때, 최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줄 수 없으니 그냥 입을 닫는다. 같이 해 줄 거 아니면 나만 재미있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