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거인, 불꽃같은 삶을 산 이상설

동지들이여 합세하여 독립을 이룩하라.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

by 김진혁

독립운동의 거인,

불꽃같은 삶을 산 이상설( 李相卨,1870∼1917)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이다.

지금의 어려움을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하루에 새벽도 두 번 오지 않는다. 난세의 영웅, 독립운동의 거인 이상설에 대해 알아본다.

그는 민족교육자. 근대 교육선구자, 국권수호를 위한 국제정치와 법률의 대가였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뛰어나고 총명했던 선생은 25세 때 조선조의 마지막 과거(갑오문과)에 급제하였고 27세에 성균관 교수가 될 만큼 비상했다.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결연히 맞서 이를 철회시켰다.

선생이 올린 상소의 요지는 일본의 요구를 물리치지 않으면 국권을 지킬 수 없으며 황무지의 개척을 자국민이 하지 않으면 국가재정이 파탄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일본의 요구를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상소투쟁도 펼쳤다. 이 조약을 무효화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약 반대운동을 했지만 일본의 강권으로 인해 저지 당 했다. 선생은 목 놓아 국망을 슬퍼하며 울었지만 결코 슬픔에만 머물지 않았다.


만주와 노령으로 망명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면서 1907년 광무황제의 특사로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파견되어 한국 독립을 호소하였다. ‘을사조약’의 무효 파기와 일제의 침략상을 낱낱이 드러내어 열강의 후원을 얻고자 노력했다.


비록 특사들은 회의에 공식적으로 참석하지는 못하지만 비공식 경로를 통해 일제의 침략과 한국의 요구를 각국 대표에게 알리는 외교적 국제정치적 거사를 제기한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독립운동


선생은 헤이그 밀사 이후 1909년 4월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연해주가 해외 독립운동기지의 최적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한인 지도자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였다. 자금을 모금하기 위한 원동임야주식회사라는 공동출자 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기지의 적지로 봉밀산으로 정하고 이 지역을 사들이고 개척했다.


또한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의 의병을 단일 군단으로 통합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여 1910년 6월 21일 십삼도의군을 편성했다.

선생은 십삼도의군에서 외교통신원의 책임을 맡았지만 전체 조직을 관리하는 실질적 책임을 담당한 것이다.

의군 편성을 위해 광무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선생은 첫째 내탕금으로 군자금을 지원해 줄 것, 둘째 광무황제가 직접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영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십삼도의군의 이러한 계획은 국내외의 정세로 보아 처음부터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었다.


1910년 8월 초 일제의 조국 병탄이 현실화 되자 이 비보를 접한 한인들은 즉시 모여 ‘망국’이라는 비극적 상황에 대처할 방안을 논의하였다. 독립의 비장한 결의를 담은 ‘성명회 취지문’을 발표하고 각국 정부에는 ‘합병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성명회 선언서’를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일제는 러시아 당국에 강력히 항의하여 주요 인물들의 체포와 인도까지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러시아 당국은 8월 30일 선생을 비롯하여 성명회와 십삼도의군의 주요인물 42명을 체포하였다. 이때 체포된 선생은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다가 1911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할 수 있었다.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 조직


블라디보스토크에 다시 모인 연해주 지역의 중요 인물들이 대거 참가하여 1911년 5월 권업회가 창립되었다. 선생을 의사부의장으로 권업회는 표면적으로 상공업 등의 실업활동을 권장하는 한편, 민족교육과 한인사회의 정치적․경제적 지위향상을 도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권업회는 ‘독립전쟁론’을 구현하는 데 활동목표를 설정하였고, 이를 위해 비밀리에 광복군의 양성을 주도했다.


광복군의 군자금도 마련하기 위해 대한광복군정부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본과 동맹국이 된 러시아 당국의 탄압으로 활동이 어려워졌다. 러시아 당국은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인의 주요 지도자들을 체포하거나 추방하였다. 그리고 권업회가 발행하던 <권업신문>을 정간시키는 등 한인들의 정치, 사회적 활동을 일체 금지시켰다.

이로써 대한광복군정부는 건립 직후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고, 조직을 유지하거나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한 채 사실상 해체되고 말았다.


권업회의 해산과 독립운동으로 인한 체력 감퇴로 선생은 1916년 초부터 하바로프스크에서 투병생활에 들어갔고 결국 선생은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하고 말았다.


선생은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는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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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을 지킨 동지들은 선생의 유언을 따라 아무르 강가에 장작을 쌓아놓고 화장하여 그 재를 북해 바다에 날렸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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