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카네기, 애국과 지혜로 독립을 구하다
연해주의 별 독립투사 최재형(1860 ~ 1920)
매년 4월5일이면 우수리스크의 ‘영원한 불꽃 추모광장’에서는 지방정부 주관으로 4월참변 추모제가 열린다.
왼쪽엔 한인 희생자, 오른쪽엔 러시아인 희생자의 위패가 놓이고, 중앙엔 최재형 초상화가 놓인다.
러시아인들에게도 신망이 높을 뿐만 아니라 고려인들은 최재형의 초상화를 집에 걸어놓을 정도로 존경했다.
한말의 독립운동가.
그의 부친은 노비였으며 어머니는 기생이었다. 그가 9세 때 함경도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 생계가 어려워지자 할아버지와 부모를 따라 연해주 지신허(地新墟)로 이주하였다.
집안은 극심한 가난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성실한 태도로 러시아어와 문화를 익혔다. 11세 때 집에서 가출하여 상선의 선원이 되어 견문을 넓혔다.
17세가 되던 때 블라디보스토크에 장사를 통해 돈을 모았으며, 부모가 있는 지신허 인근으로 돌아가 많은 땅을 사들여 농장을 운영했다. 당시 연해주에 정착한 한인들 사이에서 러시아어가 유창한 유일한 인물이었고 세계 문물에도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최재형은 러시아 군대의 통역으로 일하면서 러시아 군 관계에 폭넓은 인맥을 형성하였다. 러시아 군의 서기가 되어 두 차례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서 황제를 알현(謁見)하고 5개의 훈장을 받았다.
선생은 러시아에서 고용한 한인노동자를 관리하는 역할로 한인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대변하였다. 그는 한인들의 자녀교육에 높은 관심을 가졌으며 러시아어와 문물을 공부하도록 지원하였다.
그리고 고등소학교를 개설하여 학생들이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최재형은 도헌으로 연봉 3,000루블을 받게 되자 은행에 예치하여 그 이자로 매년 교포학생 1명씩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학시켜 한인 인재양성에도 노력하였다.
그는 러시아인들에게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군 생활품을 납품하는 회사를 설립하여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성공한 한인사업가로 명망이 높아졌다.
러일전쟁 후 국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의병을 모집했다.
폐간되었던 《대동공보》를 재발행하고 한인학교를 설립하였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 역에서 7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토 히로부미와 그 수행원들이 쓰러졌다. 안중근의 권총은 최재형이 건넨 8연발 브라우닝식 권총이었다.
1919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1920년 4월 일본은 니항사건을 빌미로 연해주 일대에 출병하여 시베리아 혁명군과 한인의병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최재형은 우수리스크에서 체포되었으며 이송 도중 탈주를 시도하였다가 총격을 받고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