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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혁 Jul 06. 2017

죽음을 제대로 알 때 더욱 의미 있는 인생이 된다

죽음을 알아야 더욱 의미 있는 인생이 된다.

     

“지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돼 있다.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알 길이 없음을 진정으로 깨닫고 이해한 뒤에야 오늘 하루가 마지막인 것처럼 열심히 살게 된다.”(엘리자베스 퀴불러 로스)   

 

    


죽음이란 단어는 기피의 대상이다.

제자가 공자에게 죽음에 대하여 물었다.

공자는 “삶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라고 했지만  나는 죽음에 대해 알고 준비할 때 더욱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종교적 관점과 선인들, 사상가들의 의견은 다양하다.


공자는 사후에 대하여 논하지 않은 불가지론자다.  그는 “ 아침에 도를 깨우친다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공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 에피큐로스 학파는 영혼은 평온한 지속적인 쾌락을 추구한다.  

모든 만물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죽음은 단지 원자의 해체일뿐  인간이 감각이 없어지는 것으로 죽음을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원자의 운동은 냉정한 규칙으로 작동한다. 자애, 성실, 공정, 쾌락, 모두가 일정한 조건에 따라 나타나는 외견일 뿐이다. 

플라톤은 말한다. 

"태어나기 전 영혼은 자유롭게 진실세계를 누비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제약 속에 갇힌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다.”  “철학은 죽음에 대한 연습”으로 이성을 통해 죽음을 극복해야 한다.



 장자는 인간의 몸은 기(氣)로 형성되어 있으며 삶과 죽음은 단지 만물의 흐름이라 했다.

즉 “ 사람은 기가 모여 태어나고 기가 형성되면 생명이 되고 흩어지면 죽는다”

즉 만물일체의 사상으로 삼ㄹ과 죽음도 자연의 변화에 순응해야 평온한 삶을 살게 된다.

죽음이란 결국 회귀하고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유(遊)라는 예술성의 생활을 요구한다.

완전한 행복이란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고 욕망을 버리는 것으로 해석한다.

     

불교에서는 생사윤회로 사후에 영혼이 육체를 떠나 육도(六道)세계에서 환생하며, 그 기준은 생전의 업보다 덕에 의존한다.


덕을 많이 쌓았으면 천(天) 인간(人間) 아수라(阿修羅)의 세계로 환생하고 악행을 저질렀다면 축생(畜生) 아귀(餓鬼) 지옥(地獄)의 세계에 환생한다.



기독교의 죽음관은 죽음은 원죄에 대한 대가이다.

예수님을 믿어야만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 기독교는 현생의 삶은 영원으로 나가는 통로로 현세보단 내세를 중시한다.

현세의 삶은 내세의 천국으로의 구원을 위해 수단적인 과정으로 보인다.

비록 현세의 과정에서 악을 행했던 사람이라도 죽기 전의 회심을 하면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

     

돈을 잔뜩 모은 후 이제부터 행복하게 잘 살아보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

죽음의 수문장에게 말하길 “미리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해 주지 않고 갑자기 데려가느냐”라고 투덜거렸다.

그러자 수문장이 한심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너에게 여러 번 죽음에 대하여 고지했었다. 너의 머리가 희어지게 해서 죽음을 준비하라는 신호였다. 또한 주변 사람들이 죽을 때 너도 죽음의 사신이 문밖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머리가 잘 안돌아갈 때에는 미리 죽음을 생각했어야지. 단지 너는 죽음이란 남의 것으로만 생각한 잘못이다.”

     

인간이 죽는 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로서 마치 죽음이 나와는 무관한 일처럼 다른 이의 죽음만을 애기 한다”고 한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박사는 "천국이나 사후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꾸며낸 '동화'에 불과하다"면서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뇌가 깜빡거리는 순간 이후에는 어떤 것도 없다"고 말했다.     

  

   


영국의 지성  러셀은 “인간은 천사와 악마의 혼합물이다” 고 한다.


천국과 지옥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결과라고 본다.

러시아의 소설가이며 사상가인 톨스토이는 기독교 신앙을 중요한 핵심으로 여겼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돕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개인개인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과 선포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고했다.

또한 그는 죽기 전  자신의 딸 사샤에게 보내는 편지에 "하느님은 한계가 없으시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진리는 오직 하느님께만 존재한다..." 고 말했다.

천국론에 관해서는 이렇게 대답을 내어 놓았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생각하며, 예수 믿고 살다가 죽었다고 가정해 보자! 죽었더니 천국과 지옥이 정말 있어서 천국에 간다면 행운이다. 만약에 없다면 손해 볼 것도 없다.  만약 천국이나 지옥이 없다고 생각해서 예수 안 믿고 살다 죽은 후에, 지옥이 없으면 정말로 다행이지만 있으면 어찌되겠는가? 손해 볼 것도 없는데 왜 안 믿는가?” 라는 논리를 펼쳤다.


오늘날‘싸나톨로지(Thanatology)’란 죽음학에 관한 학문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임사체험, 유서 남기기, 자섲ㄴ 쓰기 등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주체적으로 맞이할 것인지에 관해 공부한다.

생사학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이 학문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삶의 훌륭함과 지혜를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를 ‘죽음’에게 물어보는것이다.

   


미국의 의사이면서 죽음에 대한 전문가였던 엘리자베스 퀴불러 박사는 '죽음의 순간(On death and dying)' 저서에서 시한부 환자가 죽음 앞에서  5단계의 행동을 한다고 했다.

     

-부정과 고독(자신의 병환을 부정)

-분노(왜 나여야만 하는가?)

-타협(조물주와의 타협 만약 병이 호전된다면 어찌하겠다는 호소)

-억울함 및 우울 (치유의 희망이 없음을 알고 의기소침))

-수용(방법이 없음을 알고 현실직시)


마지막 단계인 '수용'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고 힘든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도 죽음을 맞이하면서 "나는 은하수로 춤추러 간다" "죽음은 잠시 휴가를 떠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라면서 흔쾌히 죽음을 수용하였다

 

    


인간의 목적은 사랑하고 사랑받고 성장하며 잘 죽는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심리학과 로버트 레빈 교수는

“최고의 삶의 템포란 시간과 시간 사이의 균형을 찾아 자신의 삶의 속도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고 했다.


시간과 여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졌다.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각자의 태도에 달려있다.     

종교는 사후의 향방에 대하여 알려주고 마음의 위안을 준다.

영혼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관한 충분한 근거는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을 감사하며 소중하게 여기고 싶다.

삶의 즐거움이나 고통에 관계없이 희망이 아닌 소명으로 살고 싶다.

항상 기뻐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 생각하고 오늘을 충실히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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