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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혁 Oct 11. 2018

나의 묘비명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로 영원한 삶을 꿈꾼다

나의 묘비명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로 영원한 삶을 꿈꾼다.

     

누구나 죽는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영원한 존재로서의 과정으로 삶의 일부이다.

당신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최근 존엄사[尊嚴死]에 대한 논란이 있다. 존엄사란 최선의 의학적 치료를 다하였음에도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품위와 가치를 지키면서 죽을 수 있게 하는 행위이다.  

즉 사전에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 의지다.

   

  


죽음은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맞이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태어나는 것을 자신이 선택할 수 없지만 죽음에 대하여는 자신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례를 애도하거나 피할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으로 인식했으면 한다. 특히 기독교인으로서 천국 소망의 신앙을 중시하면서 죽음을 기피하거나 무서워하는 것은 이율배반이 아닌가?


장례의 경우 망자의 삶을 뒤돌아보는 것도 좋지만 유산문제, 의료행위, 장례절차 등을 사전에 정확히 결정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내가 태어날 때 나 혼자 울 때, 주위사람들 모두는 웃었고, 내가 죽을 때는 나 혼자 웃고, 주위사람들 모두가 우는 삶을 살고자 노력한 자에게는 죽음은 승리이자 죽음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이다.  

     


당신의 묘비명을 무엇으로 정할까?


묘비명은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해 생전의 업적과 관련된 내용을 비문에 새긴 것이다.

지인이 성묘 갔다가 위트 넘친 묘비명을 전한다.


“뭘 봐, 잡초나 뜯지”익살과 위트가 돋보이지만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라는 의미심장하고 삶의 정수를 꿰뚫는 말이라고 본다.



영국의 극작가, 비평가인 버나드 쇼의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자주 인용되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재치 명문이다.

     

‘괜히 왔다 간다’(걸레 스님 중광),

‘아르헨티나 국민들이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에바 페론),

‘최상의 것은 앞으로 올 것이다’(프랭크 시나트라),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스탕달)

‘후세 사람들이여, 그의 휴식을 방해하지 마시오’(노스트라다무스)

“브루스 리, 절권도의 창시자”(이소룡)

 ‘ 일어나지 못해서 미안하오”(어니스트 헤밍웨이),



“이 사람은 하늘에서 번개를, 폭군에게서 옥띠를 빼앗았다”(벤저민 프랭클린),


 “세상에서는 토정을 잘 알지 못하고”(이지함)

 


그밖에 ‘희랍인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롭다”는 묘비명을 남겼다. 자유로운 영혼을 갈구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작가의 인생과 혼이 묻어난다.


 

서양 근대철학의 출발점이 된 철학자, 데카르트의 묘비명은. “고로 여기 이 철학자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80세까지 독신으로 살면서 자신의 고향을 평생 동안 떠나지 않았던 칸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더 커지는 놀라움”이란 철학자다운 글귀를 남겼다.

     

나의 경우 묘비를 남길 생각이 전혀 없고 시신을 기부하려고 한다.

자손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유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 - 18)"


천국 환송식으로 기쁨의 행진곡이 울리며 간소한 장례 절차였으면 한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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