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세 때부터 시 짓는 법을 배웠으며 15세가 지나자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시재를 보였다.
대대로 가난한 관리 집안에 태어났으나,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32세에 황제의 친시(親試)에 합격하고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유명하다.
장한가는 현종(玄宗) 황제와 양귀비(楊貴妃)의 비련(悲戀)에 관한 것으로 4장으로 되었다.
제1장은, 권력의 정상에 있는 황제와 절세가인 양귀비의 만남과, 양귀비에게 쏟는 현종황제의 지극한 애정 등을 노래하였다.
제2장에서는,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몽진하는 길에, 양귀비를 어쩌다 죽게 한 뉘우침과 외로움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황제의 모습을 그렸다.
제3장은, 환도 후 양귀비의 생각만으로 지새는 황제를 묘사한다.
제4장에서는, 도사의 환술(幻術)로 양귀비의 영혼을 찾지만 천상(天上)과 인계(人界)의 단절 때문에 살아 있는 한 되씹어야 할 뼈저린 한탄이 길게 여운을 끈다.
811년 40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에 어린 딸마저 잃자 인생에 있어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불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814년 태자 좌찬선태부(左贊善太夫)에 임용되었으나,
일찍이 사회를 비판하는 그의 시가의 대상이 되었던 고급관료들의 반감으로 좌천됐다.
강남호(江南好:강남은 좋지)
풍경구증암(風景舊曾暗:풍경도 옛부터 알고 있었는데)
일출홍화홍승화(日出江花紅勝火:해 뜬 강기슭 꽃이 불보다 붉구나)
춘래강수녹여람(春來江水綠如藍:봄이 오니 강물의 푸른빛 짙은 남빛 같으니)
능불억강남(能不憶江南:어찌 강남을 기억 못하겠는가?)
강남억(江南憶:강남을 생각하면)
최억시항주(最憶是杭州:제일 생각나는 것은 항주네)
산사월중심계자(山寺月中尋桂子:산사에 달빛 비치는 중에 물푸레나무를 찾고)
군정침상간조두(郡亭枕上看潮頭:군정에서 베게 베고 강하구의 조수를 보고)
하일득중유(何日得重游:어느 날에 또 놀아볼까나?)
_ 억강남(憶江南)
항저우 태수로 부임한 백거이는 제방이 자주 무너지는 것을 보고 튼튼한 둑을 쌓았다. 그는 이 시절을 잊지 못해 ‘억강남(憶江南·강남을 기억하며)’이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백거이는 장안에서 조정의 내직으로 일했으나 권세 다툼의 틈바구니에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지방 관리를 자청한다. 만년에는 벼슬을 버리고 낙양으로 은거하면서 시를 통해
세상과 소통했다.
그의 시들에서는 인간 세상을 넘나 들는 깊은 낭만적인 색채가 가득하다.
술을 마주하고
달팽이뿔 위처럼
작은 세상에서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가.
부싯돌 불꽃 같은 인생에
이 몸 맡겼을 뿐인데,
부(富)하면 부한 대로
빈(貧)하면 빈한 대로
인생을 즐기는 것이리라.
입 열어 크게 웃지 못하는 자는
정녕 어리석나니... - 白居易 / 唐나라 詩人 -
술로 시공간의 경계를 허물다.
중국 고대 예술 창작의 과정에서 술은 빼놓을 수 없는 원천이다.
이백이 남긴 시문은 대략 1500수인데 그중 직접적으로 술이 언급된 것은 약 16%이다.
현종이 모란꽃을 양귀비와 같이 구경하며 그 흥취를 드러내기 위해 이백을 불러 시를 짓게 하려는데,
이백은 술집에서 취해 있어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하고는 현종 앞에까지 끌려오다시피 했건만
일필휘지로 양귀비의 미모를 예찬한 <청평조사> 3수를 써 내려갔다.
두보는 자신은 강직해서 남에게 아첨하지 않고,
술 마시는 것 외에 다른 취미는 없고, 술을 마신 후에는 시를 짓는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절친한 벗 이백에 대해
‘이백은 술 한 말이면 시를 백 편 짓고 장안의 술집에서 잠을 잔다.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자칭 소신은 주중선(酒中仙)이라고 한다’라고 칭찬했다.
두보가 남긴 글과 시는 1400편인데 그중 20%에 술 ‘주(酒)’자가 들어간다.
백고이는 58세가 되던 해(829)에 뤄양에 정착하고 ‘취음(醉吟)선생’이라는 호를 쓰면서 시와 술과 거문고를 벗 삼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