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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Dec 24. 2015

아뿔싸! 내 인생 위기의 순간들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전학한 새 학교에서 12년 내 인생의 첫 번째 위기가 시작되었다.

그날은 대청소의 날이라 선생님의 분부대로 모든 여학생들은 교실 청소에 분주하였다.

그런데 유리창 너머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경미(가명)가 내 눈에 띄었다.

나는 생각할 여지도 없이 "선생님! 저기 경미가 가는데요."라고 말씀드렸는데 아뿔싸! 그것이 불러올 파장은 미처 생각지 못 했다.

선생님과 우리는 모두 창밖으로 경미를 불렀으나 유유히 가던 길을 마저 가던 그 아이

다음날 아침 선생님은 경미를 교실 앞으로 불러 묻는 모양이었으나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경미는 그만 선생님에게 뺨을 얻어맞고 말았다. 생각 없이 말한 내 한 마디에 일이 점점 커져서 내심 켕겼었는데..

이튿날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 당시에는 차가 거의 없어서 고속도로를 무단 횡단해야 우리 집으로 갈 수 있었다.

마루 밑에는 낯선 신발이 있고 방안에선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뭔가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귀를 기울여보니 경미 어머니가 오셔서 울며불며 우리 부모님에게 항의하고 있었다.

경미는 어렸을 때 달군 무쇠솥에 떨어져 다리에 심한 화상 흉터가 있는 사연으로 그 어머니는 좀 예민한 상태여서 나의 고자질로 경미가 뺨까지 맞았다며 몹시 흥분해서 얘기하고 우리 부모님은 묵묵부답이셨다.

점심도 못 먹고 학교로 돌아와 고민하다가 방과 후에 경미네 집으로 가서 사과를 하고자 했으나 그 어머니는 만나 주지 않으셨다. 다소간 억울했지만 어쨌든 나때문에 경미가 그런 꼴을 당했으니 미안하기도 했다.  

집으로 오니 아버지가 차분한 어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경미 아버지가 학교 육성회장이라 내가 그 어머니에게 다른 말을 못 했다. 앞으로 너는 경미와 공부로 승부해서 이기도록 해라."  

그래서 내가 공부를 하기야 했겠나 마는 아버지의 그 한 마디는 권력과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내 할 일을 꿋꿋이 하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자라는 계기가 되었다.


국가가 취업을 보장하는 국립사범대에 진학하고 보니 까마득한 선배들도 졸업 후 발령을 못 받아 대기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깻잎 팔아 보낸 대학, 발령 적체 웬 말이냐'가 주된 데모 구호였던 시절이어서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대학 시절을 보냈는데 졸업을 맞이하니 아뿔싸! 밀렸던 발령이 모두 났지만 우리 학번은 정원 이십 명 중 여덟 명만 난 것이었다.  

공부해봐야 백수일 거라는 무력감으로 학점관리를 안 했던 나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아버지 얼굴 보기가 어찌나 면목이 없던지 집에서 아버지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서실에서 하루 종일 붓질을 했더니 나중에는 붓이 내 마음 가는 대로 그려지는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첫 임용고시를 치르고서야 교사가 될 수 있었다. 컴퓨터로 채점하는 OMR 카드가 처음 도입되던 때라 정답이 1번이다가 바로 5번으로 못 넘어간다고 해서 분명 5번이 정답인데 4번을 칠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세 번째 위기는 결혼하고 나서였다.

첫아이가 돌이 막 지났을 무렵 손위 동서의 생일이 되었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던 나는 큰집에 가야 되지 않느냐고 여쭈니 어머니 왈 "놔둬라. 엊그제 아들이 군대를 가서 지금 네 형님 속이 말이 아니니 아예 아는 체도 말아라."

어머니가 시킨 대로 가만히 있으니 오후에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동서 집에 있었나? 나는 생일인데도 아무 연락이 없어서 어디 간 줄 알았지." 이러시는데 아뿔싸! 단단히 꼬여계신 듯했다.

부랴부랴 백화점에서 잠옷을 사들고 큰집에 가니 형님과 시숙은 외식하러 나가서 술을 한 잔 드셨는지 벌게 진 얼굴로 들어오셨다. 아이 손에 상자를 들려 아이를 안고 형님에게 선물을 드리니 나를 무섭게 흘겨보며 "성의가 중요하지 이런 선물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이러시는데 어머니와 시숙 보기가 얼마나 무안하고 어색한지..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정작 아무 말씀 없이 지켜만 보고 계시네. 그날 밤 나는 남편과 이혼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다.

핵가족으로 단출하게 살다가 시집이라고 오니 층층시하 인간관계가 복잡도 하여라.

동서 생일 잊은 게 (잊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리 큰 죄인지 어머니와 형님 사이에서 갈팡질팡 혼란스러운 상황이 끝도 없이 되풀이되는 것이 도무지 이혼을 하지 않고는 헤어날 수 없게 여겨졌다.  


내 인생의 마지막 위기는 동네 병원에서 위내시경을 하고 난 뒤 의사가 한 말이었다.

"위에 궤양이 있는데 위치가 궤양이 생기기 어려운 곳이라 혹시나 해서 조직을 몇 군데 뗐어요. 근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우리 병원에서 결과가 나쁜 경우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있는데 얼마 전에 그런 환자가 있었거든요."

나는 이 말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아뿔싸!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더니 일주일 후 그 의사가 좀 미안한 얼굴로 큰 병원에 가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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